24일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침해소송의 1심 평결은 예상을 뛰어 넘는 애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평결의 내용뿐만 아니라 10억5185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것 또한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 평결은 애국주의에 의한 평결의 성격이 강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애플은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상품의 외관 또는 느낌을 포괄하는 지적재산권에 해당하는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조항에서 승리를 이끌어 냈다.
애플 대변인은 이번 평결에 대해 "재판에서 제출된 증거들이 삼성전자의 모방 정도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줬다"며 "일주일 이내에 담당판사에게 삼성전자 제품의 미국 내 판매금지 조치를 요구 하겠다"고 밝히는 등 '기세 등등'한 모습이다. 또한 "도둑질은 올바른 일이 아니라는 강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보낸 배심원에 갈채를 보낸다"고도 덧붙여 일방적인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 1:100의 싸움을 한 삼성전자
삼성은 미국의 사법제도에서 비롯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번 소송 전에서 1:100의 싸움을 해야 했다.
사실상 승패의 열쇠를 쥔 배심원단의 구성부터가 문제다. 배심원단은 74명의 예비 후보 중 남성 7명 여성2명이 선택되었으며 그중 기술과 관련된 전문가는 3명에 불과하고 일반인이 6명이다.
이들을 직업별로 보면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남성, 보험사 직원, 전기기사, 사회복지사, 가정주부, 무직자, AT&T소속 프로젝트 매니저 등으로 실리콘 밸리 주민으로 한정되었다.
물론 편파적인 평결을 방지하기 위해 양측 변호사의 심문을 거쳐 선발을 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라는 지역적 특성과 스티브잡스라는 강력한 배경은 애플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아무리 중립적인 성향을 가진 배심원을 뽑는다고 하더라도 실리콘 밸리에 거주하며 스티브잡스의 전기를 읽고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기 위해 며칠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정한 평결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배심원에게 감성적 부문을 내세우는 애플과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통신기술의 침해를 주장하는 삼성은 애초부터 불리한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평결을 주도한 배심장은 컴퓨터회사에서 35년 동안 일한 베테랑으로 알려졌다. 특허 취득이 취미라며 자신의 이름을 붙인 특허를 취득하기 위해 변리사들과 7년간 합심한 경험도 있다고 했다.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반인 배심원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해 법무법인 로플렉스 소속 여인봉 국제변호사는 “특허 소송과 같이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분야를 일반 배심원에게 평결을 맡기는 것은 장님에게 흑백TV와 초고화질 컬러 TV의 화질을 평가하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라며 “이들에게 전문가 한 사람은 모두와 같다”고 이번 평결의 결과를 설명했다.
■ 판사마저 우려한 재판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북부지방법원 루시 고 판사는 21일 삼성전자와 애플 양측 변호인들과 만나 "이번 재판은 매우 복잡하고 여러 부분으로 나뉜 데다 배심원들이 매우 어리둥절해 하고 있어 걱정 된다"고 말했다
또 24일(현지시간) 발표된 배심원단 평결에 앞서 담당 판사인 루시 고(Lucy Koh·43)는 “평결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된다.”며 “이번 재판의 다툼 내용이 워낙 까다로워 배심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배심원들의 평결은 명쾌했다. ‘삼성은 애플의 대부분의 특허를 침해 했으나 애플은 삼성의 특허를 하나도 침해하지 않았다’ 심지어 애플이 특허의 침해를 인정하고 기술료가 과다하다고 주장한 표준특허에 대해서 마저 침해를 부인하는 평결을 했다.
애플이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는 ‘직사각형의 둥근 모서리와 두께가 얇고 평평한 모양의 디자인마저 특허 침해를 인정’함으로써 향후 삼성전자는 물론 세계 모든 휴대폰 업체는 네모나지 않고 두꺼운 휴대폰과 같은 모양과 디자인을 찾아야할 처지에 있다. 이에 대해서 미국에서조차도 비전문가들에 의한 지나친 평결이라는 의견이 많다.
IT 관련 전문 뉴스 사이트인 씨넷(CNET)에 ‘Liamlah’란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은 만약 애플이 자동차 산업을 했더라면 “네 바퀴와 본넷, 바퀴(스티어링 휠) 심지어는 핸들을 돌려서 방향을 전환하고 전조등을 두 개로 하는 방식의 디자인까지 소송을 할 것”이라면서 “다행히도 자동차는 미친 애플이 생기기 전에 개발되었다”라고 비웃고 있다.
또 다른 네티즌인 Voiceofreason1도 “애플이 둥근 모서리를 가진 직사각형을 발견 했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좀 더 현실적 비유로 애플이 먼저 발명했기 때문에 다른 자동차는 사각형형태, 둥근 바퀴 그리고 평평한 모양을 만들 수 없다는 것과 같다”며 “배심원들이 22시간 동안 검토하고 결론에 도달해야할 질문은 700개로 1개 문제당 1.88분이 배정되었다.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예상되고 수십 년 동안 법률적으로 회사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사건을 당신이라면 1.88분 동안 결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평결이 엉터리임을 꼬집었다. 더불어 “전 세계에서 애플이 삼성을 고소하고 있지만 상품의 외관, 혹은 느낌을 포괄하는 지적재산권인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애플이 소재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에서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디자인 특허침해 부분과 관련해 배심원들에게 제시된 지침에는 "삼성 제품이 애플 제품과 외관상 '상당히 비슷하면(substantially the same)' 특허 침해로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지침은 '상당히 비슷하다'는 판단의 근거를 "일반 소비자가 제품 구매 때 삼성 제품을 애플 제품으로 착각해 구매할 수 있을 때"라고 정의했다.
■ 삼성의 미숙한 대응
삼성 측 변호사들의 미숙한 대응으로 삼성이 불리를 자초했다는 의견들도 상당 수 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에서 마지막 변론이 있었다. 이날 삼성전자 측 변호사들은 애플 측 증인들에 대해 반대 심문을 진행하지 못했다. 삼성전자가 할당 받은 25시간의 변론 시간을 거의 다 썼기 때문이다.
외신들에 의하면 삼성은 그 동안 적극적인 공격이나 자신의 특허를 주장하기 보다는 소극적으로 애플의 주장에 반격하거나 증인들에 대한 반대심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이날 자사 측 증인들을 불러 원하는 주장을 거의 마음대로 펼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주심판사이 ‘루시 고’마저 “그것은 삼성 측의 전략에 의한 것이며 분명한 삼성 측의 실수”라며 “삼성이 선택한 전략에 다른 고려는 없다”라고 말했었다.
다뤄야할 쟁점이나 특허가 많아 세세한 사항에 따른 옳고 그름 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흐름을 평결의 기준으로 삼은 일반인 비전문가들에게 마지막 변론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최종 변론에서 애플은 이러한 배심원들의 흐름을 주도한 것이다.
이번 소송에서 배심원 중의 한사람인 마뉴엘 라간(Manuel Ilagan)은 씨넷(CNET)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삼성이 자신들의 기기들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애플의 기능들에 대해 삼성 경영진간에 오간 이메일과 마지막 날 애플이 보여 준 아이폰 이전에 삼성이 만든 기기와 아이폰 이후에 만든 기기 사진이 삼성의 특허 침해에 대한 강력한 암시를 주었다”고 말했다.
또한 “최종 증언 때 삼성의 임원들이 영상증언에 나왔는데 임원 중 한사람은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아 회사의 소송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고 말해 삼성이 배심원들의 심정적 동조를 얻는데 실패했음을 말했다.
■ 판사의 판결에 한 가닥 희망
배심원 평결이 애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나왔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판사가 이를 뒤집을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13일 '블랙베리' 제조사인 리서치인모션(RIM)이 엠포메이션 테크놀러지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배심원 평결을 받았으나 판사가 평결 내용을 뒤집고 RIM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그간 재판부가 삼성과 애플 양측에게 합의를 종용하며 최종판결시 파장을 염려했던 과정을 보면 평결과는 다른 판결을 기대할 수도 있다.
또한 항소심도 남아 있다. 갤럭시 넥서스와 마찬가지로 항소심을 준비하면서 우회하거나 회피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소송을 무효화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소송체계는 한국과 달라 항소심에서 사실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1심 결과를 놓고 절차와 법리를 따지는 법률심이기 때문에 “팩트”를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삼성과 애플은 현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9개국(미국·영국·일본·독일·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호주)에서 30여 건의 소송을 벌이고 있다. 삼성과 애플은 각각 통신특허와 디자인특허를 상대방이 침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중 독일과 네덜란드·영국에서는 1심 결과가 나왔다. 디자인 특허 침해를 인정한 것은 미국이 유일하다. 네덜란드 법원은 애플의 손을 들어 줬으나 디자인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 법원은 삼성과 애플의 특허 침해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에선 삼성이 '디자인 비침해 확인소송'에서 승리한 상태다.
나머지 국가에선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각국의 소송 결과가 다른 나라의 재판에 법리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한국이나 미국 재판에서 한쪽이 승소했다고 해도 일본·프랑스 등의 재판 결과는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다만, 이번 평결이 ‘삼성이 애플의 특허를 고의적으로 침해했다’고 평결하여 고의적 침해를 지적한 사항에 대해 징벌적 배상에 해당할 수 있다. 평결 후 소송에 의해 애플이 최대 이번 평결금액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다시 청구할 수 있어 이번 평결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 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