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가치 오름세가 심상치 않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지난달 25일 1100원이 깨지며 4거래일 연속 연중 최저치를 갈아치운 이후 1090원대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으면 그 나라의 돈 가치는 떨어지는(환율상승) 것이 정한 이치인데도 원화 가치가 오히려 오르고 있으니(환율하락) 어찌된 일인가.
기획재정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 7월부터 10월 29일까지 달러 대비 원화환율은 1146.1원에서 1095.8원으로 하락했다. 원화 가치가 달러 대비 4.4% 오른 것이다.
이 기간 중 말레이시아 링깃이 4.1%, 싱가포르 달러 3.6%, 태국 바트 2.7%, 중국 위안화가 1.7% 절상된 것에 비하면 원화가 가장 많이 오른 셈이다. .
원화가치 상승(환율 하락)의 주된 이유는 선진국 양적완화(QE: quantitative easing) 정책에 따른 글로벌 유동성 확대다. 낮은 금리에다 찍어내는 달러로 달러가치가 떨어지면서 상대방 나라의 돈 가치를 올려놓고 있다.
이들 넘치는 유동성(달러)이 유로존 위기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얹혀 경제기초체력이 상대적으로 건실한 한국으로 몰려오는 추세다. 한국이 경상수지 흑자를 지속하고 있는데다, 양호한 재정건전성 등으로 최근 신용등급이 올랐다는 점도 한 몫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의 기준금리는 거의 제로수준인 반면 한국(2.75%) 중국(6%) 말레이시아(3%) 등 아시아 기준금리는 여전히 일정 수익을 제공해준다.
우리 경제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아 그로 인해 우리 돈 가치가 오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원화가치 상승을 현실적으로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데 환율문제의 고민이 있다.
선진국의 핫머니가 몰려들면서 홍콩과 싱가포르의 부동산가격이 급등하고, 자산 가격 거품 우려로 아시아 각국들에 비상이 걸렸다는 보도도 벌써부터 나돈다.
특히 일본이 경기부양과 환율방어를 위해 한 달 만에 또다시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 든 지난달 3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환율은 달러당 1091.5원으로 마감돼 지난해 9월9일의 1077.3원 이후 13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원/엔 환율도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지난 6월초 100엔당 1500원 이상을 기록하던 엔화환율은 1400원대를 맴돌다 지난 25일에는 1370원까지 내려가며 하락폭이 깊어지고 있다.
원화가치가 올라가면 정보통신(IT)과 자동차, 특히 수출비중이 100%에 가까운 조선업계는 엄청난 환차손을 입는다.
원/달러 환율이 50원 내려가면 삼성전자의 순이익은 10%(2조원)가 줄어든다는 계산도 있다. 문제는 원/달러 환율이 추가로 하락할 가능성이 크고, 내년상반기까지 달러당 1000원이 깨질 것으로 보는 전망까지 나돌고 있다는 점이다.
환율에 대해 공식 언급을 자제하던 정부는 "시장에서 원화 강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인식의 쏠림이 너무 강한 것 같다"며 구두개입에 나섰다. 시장 참가자들이 환율을 한 방향으로만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때마침 LG경제연구원은 "달러당 1100원 선에서도 원화가치가 여전히 저평가" 돼 있다는 주목할 만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과거 경상수지가 균형점을 잡았던 시기에 비해 원/달러 환율이 10% 가까이 저평가돼 있다는 주장이다.
2012년 10월 기준 달러당 평균 1106.4원과 지난 2004년 11월의 달러당 평균 1086.5원
이던 시기를 비교해 본 결과, 달러 대비 일본 엔화는 이 기간 중 35%, 중국 위안화는 21%가 절상된 상태다.
그러나 원화는 주요 통화와의 평균적인 상대가치에서 2004년 당시보다 저평가돼 있고, 주요 교역상대국과의 명목환율과 물가변화까지 함께 고려한 원화가치 평균을 의미하는 실질실효환율지수로 봐도 과거 경상수지가 균형에 가까웠던 시기의 평균수준에 비해 10% 가량 저평가돼 있다고 한다.
앞으로 원/달러 환율이 더 하락할 여지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게다가 지속되고 있는 경상수지 흑자기조 역시 원화절상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경상수지 흑자가 수입이 수출보다 더 많이 줄어 나타난 '불황형 흑자'라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앞으로 원화가 고평가 국면으로 진입하면 이 과정에서 수출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경상수지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 수출이 환율에 울고 웃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면 경상수지가 바로 흑자를 보이고, 내려가면 어김없이 적자를 보여 왔다.
2010년 우리 수출대기업들의 사상최대 실적잔치의 일등공신 역시 '환율효과'였다. 수출대기업을 지원하기위해 정부가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시장개입을 반복하며 인위적으로 고환율기조를 유지해왔고, 환율을 인위적으로 떠받치는 과정에서 외환보유고도 3200억 달러를 훌쩍 넘어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한국에 대한 연례보고서에서 한국이 외환보유액을 '추가적으로 더 축적할 필요는 없다'며 경상수지규모 등을 고려해 사실상 원화절상을 용인할 것을 권고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원화절상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고, 정부의 노력은 그 속도를 다소 늦출 수 있을 뿐이다.주요국 경기가 동반 둔화되는 속에서 특정 환율수준을 장기간 고수하거나 하락흐름을 되돌리는 수준의 강한 개입은 국가 간 환율갈등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일본은 더 이상 엔고를 못 참겠다며 잇달아 양적완화조치를 내놓고 있고, 중국은 오는 19일 미국의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위안화 가치를 소폭 강세로 유도하는 등 국가 간 환율전쟁도 치열하다. 선진국들의 과도한 '돈 찍어내기'에 개별국가들이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이를 공동으로 견제 감시할 수 있을 정도의 신흥국들 공조체제 또한 미약하다.
정부는 점진적 절상을 유도하며 충격을 최소화하고, 과도한 자본유입과 대규모 인출 시 생길 수 있는 금융 불안가능성에 대비해야한다.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1년 미만의 단기외환거래에 일정수수료를 부과하는 '토빈세' 도입을 대선후보들이 적극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성장 불황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원화가치가 900원대, 800원대로 치솟는다면 이를 견뎌 낼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원화 강세기조의 큰 흐름을 보고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올리고 비용을 낮춰 기업체질을 단련하는 길 이외의 묘방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