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부자 세테크 수단" VS 보험업계 "서민층 피해"
전문가들 "과세기준 설정 등도 고려해야"
연말 세법개정 최종협의를 앞두고 즉시연금 과세문제가 재차'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보험업계의 극렬한 과세제도 도입 반대 속에 일각에선 사실상 제도 도입이 물 건너 간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정부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확고한 과세 의지를 밝히고 있는 상황. 양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 4년 만에 10배 이상 껑충…수상한 '목돈'의 움직임 = 정부는 올해 세법개정안 발표 당시 내년부터 즉시연금에 대해 세금(종신형 5.5%, 상속형 15.4%)을 물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즉시연금이 은퇴자 노후 대책보다는 고액자산가의 세금 회피 수단으로 활용되는 사례가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시연금은 한 번에 목돈을 낸 뒤 매달 원금과 이자를 쪼개 미리 정해둔 기간 동안 연금으로 받는 보험 상품이다. 종신형은 이자와 원금을 합쳐 받는 개념이고, 상속형은 매달 비과세로 이자만 받으면서 10년~30년 등 계약거치 기간 이후 원금을 돌려받는 구조다.
최근 즉시연금 시장은 그야말로 '광폭' 성장했다. 어렵다는 경기상황이 의심될 정도로 시중에 숨어있던 대규모 자금들이 면세혜택 이점을 바탕으로 즉시연금 시장에 몰려들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시중 7개 은행에서 판매된 즉시연금 판매 실적은 4조1431억원에 이른다. 즉시연금의 70~80%가 방카슈랑스 형태로 은행에서 판매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보험사를 포함해 10월까지 즉시연금 판매금액이 5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난해 즉시연금으로 가입된 보험료 총액(2조3789억원)보다도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지난 2008년 즉시연금 납입총액이 3306억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최근 3~4년 동안 시장규모가 10배 이상 폭증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최근 우리사회의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 출생)들의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이는 원론적 차원의 분석일 뿐. 이보다는 정부의 즉시연금 과세방안 발표 이후 은행들의 '절판마케팅(내년부터 과세가 되니 올해 안에 가입하라는 내용)'에 따른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 금융권 관계자들의 중론(衆論)이다.
실제로 즉시연금 판매액은 지난 8월 세제개편안이 발표된 이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1월~7월까지의 시중 7개 은행의 즉시연금 판매 총액은 월 평균 2900억원 수준이었으나, 8월 달 판매금액이 9000억원을 넘어섰고, 9월 판매 합계도 7000억원에 육박하는 등 기존 판매액의 3~4배를 훌쩍 넘어섰다.
정부는 이미 작년부터 시장에 이 같은 쏠림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과세방안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부 관계자는 "이미 작년부터 기존 금융상품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과세)검토 작업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 잘나가던 즉시연금, 보험회사는 오히려 싫어한다? = 금융권에 따르면 현재 즉시연금 상품에 따른 수익률은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1억원짜리 즉시연금 상품을 가입하면 매월 35만원 가량 받을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30만원 초반대로 떨어진 상황이다.
5억원짜리 상품은 과거 매달 200만원 수준이었으나, 최근에는 150만원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금융권 관계자는 "보험회사 수익성 악화우려 등에 따라 재작년, 작년보다 즉시연금 가입에 따른 월별 수령금액이 상당 수준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는 무엇보다 은행들이 방카슈랑스 형태로 보험사들의 취급했던 즉시연금 상품을 수수료(대체로 1%)를 받고 팔기 시작하면서 수익성이 상당히 악화된 데 따른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예컨대 소비자에게 보장해야 될 이윤이 평균금리 등을 가정할 때 3.6%라면, 과거 보험사들이 직판할 경우 이 이상의 수익률을 올리면 이익이 발생했으나, 최근 은행들이 판매한 즉시연금 상품은 보험사가 수수료도 지불해야 해서 자금운용에 따른 이익률 손익분기점이 5~6%대까지 치솟았다는 것이다.
보험사들의 리스크가 한층 커진 셈. 이로 인해 금융권은 즉시연금 판매를 축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교보·미래에셋·흥국 등 일부 보험사들은 방카슈랑스를 통한 즉시연금 판매를 중단했고, KDB생명도 조만간 판매중단을 검토 중이다. 또한 우체국·수협 등도 즉시연금 판매중단을 밝히고 나선 상황이다.
보험사들의 즉시연금 판매 중단은 장기화 될 가능성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시장이 어느정도 안정될 동안 보험사들이 은행, 증권사를 통한 방카슈랑스 판매를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1억 넣으면 세금 없이 매월 30만원…부자 新 '세테크' = 정부는 즉시연금 가입자 상당수를 정상적인 은퇴자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수 십년 동안 근무해서 받은 1~2억 상당의 퇴직금을 여분의 생활자금 없이 한 달에 30~70만원 받기 위해 10년 이상 가입해야 하는 상품에 굳이 한꺼번에 넣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은퇴 이후 별도의 생활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중간에 입·출금이 불편한 즉시연금에 굳이 쓸 돈까지 줄여가며 가입코자 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다"며 "이는 정상적인 은퇴자가 선택하기 어려운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부인, 자녀, 지인 명의를 통한 분산가입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예컨데 15억원 자산가가 부인, 자녀 명의로 각각 5억원씩 즉시연금 상품에 가입해도 이에 따른 이자소득에 과세할만한 명분이 없다는 얘기다.
정부는 이처럼 즉시연금이 일부 고액자산가들의 세금을 피해 자금을 굴리는 수단으로 변질됐다는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즉시연금 가입자와 납입금액이 단기간에 이례적으로 대폭 오른 사실도 이 같은 정부의 의문점을 더 키우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보험업계는 정부가 과세 제도를 도입할 경우, 서민층의 연금가입 장벽을 높이는 역효과가 발생될 수 있다며 반대입장을 밝히고 있다. 업계는 최근 대선을 앞두고 조세소위가 개점휴업 중인 상황에서 개정안 통과를 막기위해 더욱 실력행사에 나서고 있다.
한국보험대리점협회는 지난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즉시연금 과세가 부유층 증세보다는 서민의 보험해약을 부추기고 노후보장을 위태롭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며 세법개정안 철회를 요구했다.
생명보험협회가 최근 즉시연금 가입자를 분석한 결과, 전체 계약 가운데 1억원 이하 비중이 55.60%로 절반 이상이며, 1억원 초과~3억원 이하가 27.66%, 3억원 초과~5억원 이하 10.11%, 5억원 초과 10억원 이하 5.63%, 10억원 초과는 1.01%로 각각 집계됐다.
업계는 1억원 이하 가입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만큼, 이들을 정부 판단처럼 전부 고액자산가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업계 일각에선 3억원 이하 가입자는 고소득층으로 보기 어렵지 않냐는 시각도 있다.
□ '중도인출액' 조정으로 절충점 찾을까? = 보헙업계는 표면적으로 과세자체를 철회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세제도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정부와 절충점을 모색하고 있다.
정부는 현재 즉시연금은 금액과 관계없이 과세하되, 10년 이상 매월 불입하는 연금에 대해서도 중도 인출 시 과세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은 상황이다.
즉시연금 외 매월 불입하는 보험도 과세대상에 포함시킨 이유에 대해 재정부 관계자는 "기존 장기주택마련저축, 세금우대저축 등도 정해진 약정기한 이전에 중도인출하면 과세된다. 연금이나 보험상품이라고 비과세로 예외를 두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부는 연간 200만원 이하의 중도인출 및 사망, 해외이주 등 불가피한 상황에 따른 중도인출에 대해선 예전처럼 비과세 하는 보완책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 보험업계 일각에선 연감 중도인출 한도금액을 1800만원으로 늘려달라고 강력히 요청하고 있지만, 정부가 이 안을 그대로 수용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특히 상속형 즉시연금의 경우 1800만원 중도인출까지 비과세하겠다는 의미는 시중금리 등을 고려할 때 5억원짜리 즉시연금 상품까지 면세혜택을 주겠다는 뜻과 같기 때문에 사실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 정부 당국자들의 입장이다.
이처럼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국회 협의과정에서 중도인출금액 등을 포함한 법안이 미세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 과세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정부와 즉시연금에 가입한 실질 중산층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업계 사이에 절충안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보험업계 일각에선 적어도 즉시연금 금액 2~3억원(연간 중도인출 금액 600~1000만원)까지는 비과세 혜택을 유지해야 한다며 협상 '마지노선'을 제안하고 있다.
재정부 관계자는 "일단은 원안대로 시행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국회 심의과정에서 업계 의견들을 수렴해서 중도인출금액 등과 관련된 추가 합의, 조정안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부, 보험업계 양측이 과세문제 자체로 대립하기 보다는 일단 과세제도를 도입하되, 현실에 맞게 과세기준을 재설정하는 방식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보다 합리적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