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경제 불황의 한파는 새해에도 그 위력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다. 연초부터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며 수출 기업들이 피해를 보는 등 벌써 기업 환경을 둘러싼 한기가 대단하다.
2%대 저성장 시대에 맞닥뜨린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경제 위기와 함께 '경제 민주화'를 전면에 내건 정치권 공세에 내우외환의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세일보는 정치권의 기치로 내세워진 경제 민주화에 대해 긍정적 측면도 상당한 것으로 판단하지만, 단순히 포퓰리즘 차원의 정책이나 글로벌 시대에 역행하는 정치 공세는 과감히 경계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기업들이 처한 환경을 정확하고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박근혜 정부의 대기업 정책이 확고하게 굳어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근간을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과 국부의 원천인 대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경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조세일보는 향후 박근혜 정부 5년 동안의 대기업 정책이 바람직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기업들이 처한 현실과 올바른 기업 정책을 집중 조명하는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를 창간 12주년 특집으로 진행했다. - 편집자 주
◆…지난달 31일 오후 SK그룹 계열사 자금 횡령 등의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로 불구속 기소된 최태원 회장이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입장하는 도중 취재진으로부터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이날 최 회장은 법원으로부터 징역4년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대기업 오너 잇따른 실형…경영공백 등 불가피
재벌 봐주기 관행 제동 '긍정적'…오너경영 '빨간불'
경영안전판 마련 시급…업무상 배임 등 법률 보완 필요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징역 4년6개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징역 4년, 최태원 SK그룹 회장 징역 4년.
대기업 오너들이 최근 잇따라 법원에서 실형 선고를 받자 업계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기업 총수는 '국가 경제발전 기여', '경제계에 미치는 충격' 등을 이유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이 공식처럼 적용됐던 것과는 천지차이의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
대기업 오너들에 대한 판결이 엄격해진 이유는 최근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경제민주화 논의가 급부상되면서 대기업에 대한 잣대도 그만큼 강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
하지만 잇따른 대기업 오너 구속으로 인한 경영공백과 경제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경영 안전판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세일보가 대기업 오너 구속에 따른 한국경제의 득과 실과 함께 이 같은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완책은 없는지 살펴봤다.
■ 대기업 오너 잇따라 실형…딜레마 빠진 경제 = 대기업 오너들이 법원의 높아진 잣대를 실감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해 횡령 및 배임혐의로 징역 4년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가 현재는 지병으로 구속집행이 정지된 상태이고,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 역시 같은 혐의로 지난해 말 2심에서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또 지난달 31일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600억원대의 회사 돈 횡령 혐의로 기소돼 1심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에서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4년 실형을 언도 받았다.
이처럼 대기업 오너들에 대한 잇따른 실형 선고는 재계에 충격파를 전해주고 있다. 과거 폭넓게 인정되던 법관의 재량이 줄어든 이유도 있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반기업 정서가 급속하게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더구나 박근혜 당선인도 공약을 통해 강도 높은 재벌개혁을 시사한 바 있어 재계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는 분위기다.
대기업 오너들에 대한 엄격한 법원의 잣대가 과거 '재벌 봐주기'의 관행을 깬 의미 있는 판결로 받아들여지면서도, 국내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경영공백과 반기업·반재벌 정서의 확산에 대한 걱정도 그만큼 배가되고 있는 것.
대한상공회의소는 최태원 회장에 대한 판결 직후 논평을 통해 "대내외 경제환경이 매우 어렵고 수출과 내수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실형선고를 받게 되어 안타깝다"며 "이번 판결로 인해 그동안 그룹에서 진행해 온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기업 활동과 지배구조 개선작업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전국경제연합회도 논평에서 "이번 판결을 계기로 최근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반기업정서가 더욱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한다"며 불안을 숨기지 않았다.
더욱이 대기업 오너에 대한 처벌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재판을 기다리거나 수사를 받고 있는 대기업들 역시 좌불안석이긴 마찬가지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300억원 가량을 횡령하고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100억원의 손실을 회피하는 등 횡령·배임 혐의를 받고 있으며, 현재 법원 심리를 앞두고 있다.
또 이호진 태광그룹 전 회장 역시 1400억원대 회사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2심이 진행중이다.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은 300억원대의 회사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지난해 6월 구속돼 10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뒤 지난 1월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에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나 검찰의 항소로 3심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과 구자원 LIG그룹 회장과 구본상 부회장도 각각 탈세와 재산 해외도피, 300억원대 기업어음(CP) 부정 발행혐의를 받고 검찰수사와 재판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입장이다.
검찰수사가 진행중인 신세계 이마트와 현대자동차 역시 반기업 정서의 피해를 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는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이성희 부장검사)로부터 노조활동을 막기 위해 직원들을 전방위 사찰한 의혹을 받고 수사를 받고 있으며, 신세계의 계열사 부당지원 여부도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박은재 부장검사)에서 수사가 진행중이다.
현대자동차도 불법파견 혐의를 받고 울산지검 공안부로부터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있다. 대법원이 현대차의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내놓은 만큼 이번 수사가 어떻게 결론을 낼지 쉽게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 한국경제 키워 온 오너경영 '빨간불' 켜지나 = 법원에서 '재벌 봐주기'의 관행에 제동이 걸린데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 많지만 주요 대기업 오너의 구속에 따른 장기간 경영공백에 따른 우려도 만만치 않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지난해 말 오너들이 구속된 이후 대기업의 경영 성과를 분석해 보니 영업이익 증가율이 낮게 나타났다"며 "한화나 SK 등 오너그룹들의 특징은 결정권인데 인사과 투자결정이 늦어지다 보니 경영성과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 CEO스코어가 지난해 오너 구속이나 검찰조사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SK, 한화, LIG, 태광 등 4개 그룹 계열 상장사의 3분기 누적실적 기준 영업이익을 한국거래소와 금융감독원의 공시자료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 2011년 대비 최고 9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적이 가장 추락한 곳은 태광으로 흥국화재해상보험과 태광산업, 대한화섬 등 3개 상장사의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347억원으로 2011년 대비 89.8%가 감소했다.
SK그룹도 모두 17개 상장사의 영업이익이 반토막이 났다. SK그룹의 17개 상장사의 3분기 영업익은 7조29억원으로 2011년 13조3312억원에 비해 47.5%나 줄어든 것으로 파악됐다.
한화 역시 실적이 내리막을 기록했다. 6개 상장사의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1조224억원으로 2011년 같은 기간 1조1384억원보다 10.2% 줄었다. 매출도 오너 구속 등의 여파로 직격탄을 맞아 28조원에서 27조7000만원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분명히 법을 엄격한 기준으로 적용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기업에 실(失)이지만 장기적으로 득(得)인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이들 대기업들은 강력한 오너 경영으로 그룹을 이끌어 온 만큼 상당기간 경영 차질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지적대로 이들 기업들의 경영 리스크는 분명해 보인다.
SK그룹은 지난 2003년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이후 경영불안을 겪은 바 있다. 중국 정보기술(IT) 사업이나 생명과학 신사업 진출이 무산되고 영국계 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의 적대적 인수합병에 노출되며 상당한 후유증을 겪었다.
오너의 부재 속에 남겨진 미래 먹거리 사업도 상당 부분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이 의욕적으로 추진중인 전기자동차 배터리 사업, 인천정유 공장 1조6000억여원 투자하는 밸류업 프로젝트, SK하이닉스 반도체사업 투자 등이 당장 오너의 결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당기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화도 지난 2년여간 준비해 온 수주금액 9조원 규모의 이라크 신도시 건설이나 동남아시아 태양광 사업 및 생명보험업 진출 등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다.
한국 대기업의 경영 특수성상 오너가 장기간 자리를 비울 경우 일반적인 시설 투자는 몰라도 장기간 안목을 두고 새로운 신성장동력의 연구개발(R&D)에 투자를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들 기업의 경영 위축이 회생 기미를 보이고 있는 한국 경제에 상당한 리스크로 작용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 상황이다.
■ 대기업 오너 구속, 남겨진 과제는 = 최근 일련의 대기업 오너 구속과 관련해 반기업의 정서를 증폭시키기 보다는 한국경제의 경영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경영안전판을 마련하는 냉철한 대응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우선 대기업 오너 경영에 대한 편견은 한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윤창현 금융연구원장은 "우리가 황제 경영이나 가족 경영, 선단(船團) 경영, 세습 경영이라고 비판하는 국내 대기업의 오너 경영은 자동차나 반도체 산업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해 성공을 이끈 측면도 있다"며 "사실 기업의 지배구조라는 게 장단점이 혼합돼 나타나는데 오너 경영의 단점만 부각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근 사회적 분위기 속에 '재벌 봐주기'의 관행이 사라진데는 일면 사회적으로 진일보한 측면이 있지만 오너 경영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것은 한국경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계기를 통해 대기업 오너에 대한 견제장치를 정비하는 등 경영안전판에 대한 점검도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지수 좋은기업지배연구소 변호사는 "최근 대기업 오너들의 잇따른 구속은 지배구조 차원에서 오너리스크로 이야기하는데 총수들이 견제가 없는 상황에서 이해상충되는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며 이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그는 "최근 주요 대기업 오너들이 구속되면서 가장 큰 실(失)은 기업 자체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서 사회적인 비용을 증대시키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내부완충장치 마련이 시급하며 박근혜 당선인도 이 같은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 상법 개정을 한다고 했으니 이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기업 오너의 구속의 가장 큰 실(失)은 기업 경영리스크가 증폭되면서 사회적비용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무엇보다 이사회 등 내부견제 장치를 확고하게 마련해 경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지적이다.
일방적인 '마녀사냥식 기업 죽이기'에 대한 우려도 상당하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업무상 배임죄의 범위가 넓고 애매한 부분이 많다"며 "독일의 경우 경영진이 기업에 손해를 입힐 의사가 있고 이를 통해 이득을 보고 회사가 실제 손해를 봐야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추상적 위험범위라 하여 그럴 우려가 있으면 증거가 없어도 처벌이 가능하다"고 꼬집었다.
실제 일반적인 배임죄의 경우 기소를 하면 무죄 확률이 3% 정도 되는데 기업의 업무상 배임죄의 경우는 무죄확률이 20% 정도로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분석.
전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업무상 배임죄의 남용 소지가 큰데 자칫하다보면 대기업 오너들에 대해 사회적 여론을 근거로 마녀사냥식 실형 선고가 되며 경영을 급격히 위축시킬 소지가 크다"며 "이에 대한 향후 법률 보완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