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속 드러나는 차명 계좌…솜방망이 처벌이 '부채질'
차명 계좌 음성적 거래의 온상 부각…제도 개선 시급
CJ그룹의 차명 계좌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금융기관의 허술한 관리와 솜방망이 처벌이 화살을 맞고 있다.
1993년 한국에 금융실명제가 도입, 20년이 흘렀지만 금융회사들은 여전히 재벌 기업의 검은돈 창구를 하거나 비자금, 탈세, 횡령을 돕는 공범이 되고 있다.
금융 당국 역시 금융기관에서 횡행하고 있는 불법 차명 거래를 시스템상으로 걸러내지 못하며,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 영업정지 처벌 있으나 마나, 과태료는 겨우 1000만원 = 새 정부 출범 후 자금 세탁 및 지하경제에 대한 수사가 강화되면서 최근 들어 불법 차명 계좌의 실체가 속속 드러났다.
검찰은 CJ그룹의 차명 계좌와 관련 금융감독원에 금융회사의 고의 여부를 조사해달라고 의뢰한 상황.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외국인 이름까지 빌려 수백 개의 차명 계좌를 만들고 계열사 주식을 거래해 주가조작을 하거나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우리은행을 포함해 증권사 일부가 차명 계좌를 개설해준 의혹을 받고 있다.
또 최근에는 우리은행, 한국씨티은행, 부산은행 등에서 차명 계좌를 불법으로 운용한 사실이 금감원으로부터 적발돼 과태료와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우리은행의 경우 지난해 밀항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김찬경 전(前)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자금 세탁에 관여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관인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조사 시스템이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FIU는 거액의 현금 거래가 발생하면 이 정보를 자동으로 송출 받거나 금융회사 직원이 보고를 하도록 하고 있으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산은행에서는 100개에 가까운 차명 계좌가 적발됐으나 담당 직원 정직과 감봉, 견책 등의 경징계만 내려졌다.
현행법상 차명 계좌를 개설한 금융회사는 일정 기간 동안 신규 계좌 개설이 금지되거나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및 과징금을 처분 받을 수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재벌 기업들이 가족이나 임직원의 명의로 차명 계좌를 만들고 횡령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또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예금을 유치하거나 각종 자금 거래와 관련한 수수료 수입을 올려야 하는 금융회사 입장에서 차명 계좌를 눈감아 줄 수밖에 없는 것도 문제다.
금융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금융회사 입장에서 대기업 고객은 VIP 중의 VIP이다. 알고도 눈감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겠지만 법적 처벌이 약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외국의 경우 차명 계좌를 개설해준 금융회사에 무거운 책임을 부과하지만 우리 법은 영업정지 처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과태료도 가벼운 편"이라고 덧붙였다.
■ 불필요한 예금계좌 잔뜩, 후진적 금융 관행 = 금감원의 분쟁 조정 사례를 봐도 은행들의 실명 확인이 무책임하게 이뤄지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A은행에서는 위조된 공무원증을 통해서 예금계좌를 만들어주고 타인의 명의로 받은 신용카드 대출이 입출금된 일이 있다.
당시 은행에서 보관한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이 위조 공무원증은 발급 기관이 엉뚱하게 표기돼 있는 등 허술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명 확인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
불필요하게 개설되는 예금계좌들도 후진적 금융 관행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가명이나 무기명 거래는 현저하게 줄었지만 일반 예금자의 계좌 수는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반인들도 편의상 여러 개의 계좌를 만들기 때문에 계좌 수가 수시로 변동한다"며 "거래가 발생하지 않는 빈 계좌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정부 당국 관계자는 "은행원들이 실적에 목매느라 불필요한 통장들을 양산해내고 후진적 관행들이 계속되면서 금융 사고와 직접 관련이 없어도 결국 음성적 거래의 온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외국에서는 예금계좌 하나를 만들더라도 여러 날이 걸리는데 쉽게 쉽게 만들어지는 제도를 바꿔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