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진 칼럼] 흥남 부두와의 인연
작년 연말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했다. 부산 국제시장은 나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영화 속 부산은 곳곳이 낯설지가 않다. 부산의 옛 모습보다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영화 시작할 때 나오는 흥남부두 철수장면이다. 약 10만 명이 살기위해 배에 오르는 모습을 보니 21년 전 한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느 날 할머니 J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북한 함흥여고 출신으로 6·25 때 남한으로 피난을 왔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들을 성공시킨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였다. “저와 제 가족의 목숨을 구해주신 분들을 위해 감사의 구명시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할머니는 잊을 수 없는 격동의 그날을 회상했다.
1950년 12월 24일. 당시 20대였던 J씨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흥남부두에서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중공군의 제2차 공격이 시작된 북한을 탈출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흥남 철수 작전을 시행 중인 미군 함정을 타는 길뿐이었다.
멀리서 들렸던 포격소리는 부쩍 가까워졌고 아이들은 공포에 떨었다. 살인적인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피난민들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때 미군 측에서 작전에 없었던 피난민 승선을 허락하는 명령이 떨어지자 흥남부두에 밀집한 10여만 명의 피난민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일사분란하게 함정에 오르기 시작했다.
애타게 순서를 기다리던 J씨가 아이들을 달래며 배에 오르려던 순간 그만 탑승이 중단되고 말았다. 더 이상 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함정 구석구석은 피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군함에 타지 못한 피난민들은 일제히 빅토리호 앞으로 몰려갔다. 빅토리호는 미군에게 물자를 지급하기 위해 흥남부두에 정착 중이었다.
“제발 아이들만이라도, 아이들만이라도 데려가주세요!” 애끓는 절규가 선장의 가슴을 울렸다. 한국말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선장 레너드 P 라루 씨는 눈물로 호소하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한동안 깊이 침묵하던 선장은 승무원에게 말했다. “저들 모두를 태우고 갔으면 좋겠네.” 승무원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최대 정원 59명의 배에 1만4000여 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구명시식 이후 나는 한동안 흥남부두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2014년 2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초청으로 무명용사에 헌화 참배를 하였다. 그리고 워싱턴 인근 전역군인들을 위한 실버타운에서 에드워드 로우니 퇴역장군을 만났다.
97세의 그는 6·25 전쟁 때 당시 중령으로 참전하였고. 흥남부두 철수 때 부두를 폭파하고 마지막으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포드 중령과 함께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들을 태워야 한다고 강력히 설득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6·25 전쟁 때 그가 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를 초청하고, 그의 자서전 <운명의 1도>도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는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하였다.
흥남을 어렵게 탈출한 할머니의 감사 구명시식이 나에게 전달되었고,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또 한 사람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만나게 해 준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은 그렇게 작은 인연으로 움직인다. 영화 속 흥남부두 철수 장면에서 두 사람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