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순으로 이자를 깎아준다며 정부가 앞장 서 국민을 은행 창구에 줄 세우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변동금리대출이나 이자만 갚고 있는 대출을 연 2.6% 수준의 고정금리·분할상환 대출로 바꿔주는 이른바 안심전환대출이 지난달 24일 출시돼 4일 만에 20조 원 한도가 모두 소진되는 ‘흥행대박’을 쳤다.
20조 원이 모두 소진되자 금융당국은 추가로 20조 원을 투입했다. 하지만 신청열기의 ‘광풍’은 2차분 접수에서 바로 꺾였다. 선착순으로 진행된 1차와 달리 2차는 일괄접수 후 승인여부를 결정해 앞 다퉈 몰려갈 필요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의 일부도 함께 갚아나가야 하는 부담 때문에 갈아타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20조원 한도 중 14조원에 대한 대출신청을 접수했고 마감 결과 33만 명이 안심대출로 갈아타게 됐다. 우리의 주택담보대출은 이자만 갚다가 집을 처분할 때 대출 원금을 갚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금융권도 당초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는 안심전환대출로 갈아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자못 회의적이었다.
저소득층 가구의 경우 늘어나는 원금 부담으로 인해 사실상 안심대출전환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대출금이 5000만원인 경우 3%의 변동금리 이용 시 매년 이자는 150만원을 납부하면 되지만, 10년 만기 안심전환대출로 갈아타면 원리금을 합해 연간 567만원을 납부해야 한다.
저소득층인 1분위 가구의 경우 연간 가구소득 평균 825만원의 절반이 넘는 417만원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소득 1분위 가구가 안심전환대출의 만기를 30년으로 늘리더라도 추가납부 금액은 연간 가구 소득의 10%가 넘는 수준이다.
기본적으로 안심대출은 이자만 내는 사람들이 장기간 원리금을 균등분할 상환하는 대출로 갈아탈 수 있도록 ‘단군 이래 최저금리’라는 당근을 제시한 상품이다. 연 2.5~2.6%대의 파격적인 고정금리로 금리 변동의 위험을 줄이고 계획적인 대출상환을 유도해 가계부채의 질을 개선하겠다는 금융당국의 정책목적이 담겨있다.
시장원리를 팽개친 금융당국의 이같은 극약처방은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당초 손사래 치던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안심대출의 종잣돈을 보탠 것이나, 은행권이 수천억 원의 손실을 무릅쓰고 협조한 대목에서 가계부채 1100조원 시대의 위기의식이 읽혀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담보부채 구조가 전체 금융시스템에 위험요인이 되고 있다는 경고를 지난 1월 발한 바 있다.
가계부채는 3월말 기준으로 1100조 원을 넘을 예정이다. 최근 석 달 사이에만 15조 원이나 늘어나 국민 한 사람당 21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 가계들이 지나친 빚을 갚아나가는 디레버리징(deleveraging)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데도 우리는 오히려 빚을 늘리고 있다.
빚 갚기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개인의 가처분 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1990년대말 이후 높아지기 시작해 2009년에 이미 143%, 지난해 말 160%로 높아졌다. 미국(128%)과 일본(112%) 등 어느 선진국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한국의 가계는 빚 원금을 갚거나 이자지급에 소득의 20%를 쓰고 있고, 주택담보대출자의 74%가 매달 이자만 내며 버틴다. 미국의 경우 이 비율은 14%에 불과하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때의 미국보다도 지표상으로는 훨씬 위험하다.
1089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366조 원(2014년 말 기준)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76%나 된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시작돼 대출 금리가 상승세를 타면 가계가 이자 부담 상승으로 휘청거릴 게 뻔하다.
일단 일부라도 고정금리·원금분할상환 대출로 바꿔 가계부채 구조를 개선시키자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 안심전환대출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안심전환대출로 대출자들은 금리 부담을 덜게 되지만 그 비용은 은행과 주택금융공사가 나눠서 진다. 은행들은 이자 수익을 포기하고, 주택금융공사는 주택저당증권(MBS)을 발행해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
안심전환대출이 전체 주택담보대출 중 고정금리 비율 확대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위한 졸속 정책이라는 비난도 벌써부터 쏟아진다. 1차 안심대출 이용자의 평균 소득이 연 4100만원, 가계대출 가운데서도 가장 우량한 대출인 주택담보대출, 그것도 연체 위험이 적은 중상위계층이 실제 대상이라는 점이 그 이유다.
가계부채 뇌관은 저소득층에서 터질 확률이 높고 이들의 가계부채 구조개선이 더 급하다. 9억원 이상의 주택소유자(대부분 소득 4~5분위)는 스스로 대처할 능력이 있다고 간주한다하더라도 제2금융권 대출자(주로 소득 1~2분위)는 아예 대상에서 빠져있다.
정부당국자는 “안심전환대출 혜택을 받지 못한 제2금융권 대출자나 기존 고정금리 대출자를 배려하는 방안을 찾겠다”며 서민가계부채 지원대책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안심대출이 ‘하우스푸어 쓰나미’위험에 대한 ‘안심장치’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가계부채 총량 자체가 가파르게 증가하는데다, 갈아 탄 안심전환대출 가입자들이 원금을 꾸준히 갚아나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전세난 탓에 내 집 마련을 위해 저금리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수요자가 늘어나면서 가계부채가 늘고 있지만 주택 구입 등 실수요에 따른 대출 증가인 만큼 내수경기 진작으로 이어질 것이란 낙관적 관측도 있다. 당국 역시 가계부채 규모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며 금융위기를 초래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설명을 누누이 되풀이한다.
하지만 정부가 가계부채 대응 적기를 사실상 놓쳤다는 비관적 분석도 고개를 든다. 돈을 빌려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한편에선 빚을 관리하느라 쩔쩔매는 모순은 흥분제와 진정제를 동시에 놓는 격이다. 경제살리기 일환으로 부동산 띄우기가 불가피하다는 정부의 관점은 너무 위험하다. 안심전환대출로 모든 가계부채가 감당될 것 같은 기대효과를 부풀리는 것은 또 다른 포퓰리즘이다.
당면한 가계부채의 구조개선 뿐만 아니라 거시적 입장에서 부채규모에 초점을 맞춰 총부채상환비율(DTI)을 강화하고 제2금융권의 신용대출을 축소하는 등 전체 빚 규모를 줄이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총량을 억제하는 한편으로 제2금융권 채무자나 저신용자, 다중채무자 등 ‘질 나쁜 빚’에 대한 맞춤형 채무조정 지원 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근본적인 대처방안 없이 안심전환대출을 제 아무리 확대해도 대증적 효과에 그치고 만다. 임시방편보다 정공법으로 가계부채 해결에 나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