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만 모르는 세상의 변화" = 70~80년대와 비교하면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다.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도로에 차가 많아지는 등 외형적인 것 뿐만 아니라 물가도 많이 오르고 국민들의 의식수준과 생활패턴도 완전히 딴판이 됐다. 하지만 정부는 시대의 변화를 한 두 걸음 멀리 떨어진 채 과거의 기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정부가 의식과 시각을 바꿀 차례다.
500원짜리 자장면 팔던 시대는 갔다
라면 1봉지 20원, 자장면 1그릇 500원, 곰탕 1그릇 1200원, 냉면 1그릇 1300원.
1970년대 물가이다. 당시 1000원도 되지 않는 가격에 자장면을 사 먹을 수 있었지만 45년이 지난 지금은 최소 45000~5000원은 줘야 사먹을 수 있다. 10배 이상 가격이 오른 셈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물가도 점점 오르고 있고 국민들의 씀씀이도 달라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세법은 이처럼 변화해 온 시대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5000원을 가지고는 점심 한 끼 해결하기도 힘든 시대가 됐지만 세법은 20년전 만들어진 기준을 그대로 쓰고 있다.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냥.
형편에 따라 나뉘지만 성인이라면 누구나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보험도 마찬가지. 생명보험 하나와 자동차 보험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연간 지출액이 200~300만원을 넘나든다. 보험을 드는 이유는 미래 리스크에 대한 '안전장치'다.
보험사들은 보험상품 광고에서 항상 '가족'을 앞에 내세운다. 보험은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부분을 커버하기 위해,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현재의 희생(비용지출)이 동반된다.
하지만 근로자들이 보험을 유지하는 비용에 대한 세금혜택은 여전히 과거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오늘 식사메뉴는 '라면' 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지불하는 가격에는 물건값 뿐만 아니라 인건비, 물류비 등 물건 생산과 판매에 필요한 모든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물건을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사업자(법인)들은 접대비 등 일부 비용을 제외하고는 사업유지에 소요된 사실상의 모든 경비를 제외한 뒤 남는 순이익에 대해서만 세금(법인세)을 낸다.
하지만 근로자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근로자는 '삶의 유지 수단'인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교통비를 지출하고 점심식사로 식비를 지출하고 그 외 출근하는데 필요한 의류나 가방등 물건들을 구매하지만 이를 온전히 비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현행 세법은 근로자들의 경우 매월 식대 10만원(연간 한도 : 120만원)를 비롯해 벽지근무수당 20만원(연간 한도 : 240만원), 자가운전보조금 20만원(연간 한도 : 240만원) 및 출장여비 등을 월급에 포함해 지급받을 경우, 이 부분만큼은 과세대상 소득에서 제외해 주고 있다.
문제는 식대와 교통비 성격인 자가운전보조금 등의 비과세 한도가 현실과 너무 큰 차이가 난다.
담배 한 갑 가격도 4500원이 된 지금, 5000원 가지고는 점심 한 끼 해결하기 힘들다는 것은 직장인 누구라면 공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하지만 비과세 한도는 월 10만원. 주5일제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월 20일 근무) 달랑 하루 5000원 꼴이다.
불가피한 야근으로 인해 지출할 수밖에 없는 저녁식사 비용까지 고려하면 직장인들에게 세법이 허용한 최고급(?) 식사메뉴는 분식집에서 끓여주는 2000원~2500원 수준의 라면이 고작이다.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의 평균 점심값은 2009년 5193원, 2014년 6488원으로 5년 동안 1295원이 올랐지만 식대 비과세 한도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자가운전보조금도 마찬가지다. 자가용이 보편화되고 기름값도 비싼 지금, 자가운전자가 출퇴근을 위해 지출한 비용은 월 20만원까지만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 기준 또한 1994년에 만들어졌다. 국민들은 현재를 살지만, 정부의 시각은 11년 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비용에 대한 세금혜택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11년 세법이 개정, 신용카드 사용액 소득공제에 '대중교통비 소득공제(연간 한도 : 100만원)'가 도입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출산 문제 해소를 위해 기업들의 역할을 틈나는대로 강조하면서 기업들이 소속 근로자들에게 지급하는 금전에도 전혀 동떨어진 기준이 만들어져 있다. 자녀출산, 6세 이하 자녀 보육비로 받은 금전에 대해서는 달랑 10만원(월 기준, 연간 한도 : 120만원)만 비과세 소득으로 인정된다.
세금을 내고 안내고의 문제를 떠나 이렇듯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구닥다리 제도의 틀을 유지하는 것은 근로자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왜 근로자들을 정부가 '봉'으로 본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지, 왜 근로자들을 '유리지갑'이라고 지칭하는 지 그 이유를 정부만 모르고 있는 셈이다.
보험비용 지출과 관련한 연말정산 체계도 국민의 시각과는 차이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현행 보험료 공제는 한도 100만원에 세액공제율 12%가 적용, 보험료로 100만원을 지출하든 500만원을 지출하든 딱 12만원만 세금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저축 목적이 가미된 보험상품 가입을 제외하고 생명보험, 실손보험 등은 가족구성원이 갑자기 사망하거나, 중병 또는 사고로 큰 비용지출 요인이 생길 것을 대비해 현재를 희생(비용지출)하는 개념이다. 또한 국가가(건강보험)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메우는 최선의 수단이다.
2002년 보험료 공제한도를 100만원으로 끌어올린 정부는 2015년 현재 '복지확충'을 위해 엄청난 빚을 내고 있는 정부가 됐다. 국민들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 가는 복지자구책인 보험과 관련한 정부의 시각이 13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이율배반'이라는 지적이다.
근로자는 결코 '봉'이 아니다
지난해 연말~올해 초 온 나라를 들쑤셔놓은 연말정산 대란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가 이를 수치적 문제로 접근해 의미를 축소하려 해서는 곤란하다.
총급여(연봉에서 비과세소득을 제외한 금액) 5500만원 이하 근로자의 경우 평균 실효세율이 1.16%, 7000만원 이하의 경우 4.27% 등 전체적으로 5%가 채 되지 않는 실효세율을 적용받고 있는 1600만 근로자들이 연말정산 대란에 휩싸인 것은 손쉬운 세수확보를 위해 근로자들에 대한 조세정책을 너무도 가볍게 접근하는 정부의 태도에서부터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정부가 2~3년 전 신용카드 소득공제 폐지안을 내놓았을 때 가져다 붙인 명분은 '정책효과 소진'이었다. 지난해 말 담뱃값 인상(개별소비세 신설)시 앞세운 간판은 '국민건강'이었다. 하지만 이 두 정책의 최종 지향점(?)은 '세수'였다.
연말정산 관련 제도를 개편하는데 있어 정부가 '세수'를 고려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나치게 세수친화적 시각으로 접근하려 하니 근로자들을 봉으로 본다거나 유리지갑만 털려고 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담뱃값만을 물가와 연동시켜 매년 올리겠다는 발상을 버리고 근로자들에게 적용되는 식대와 자가운전보조금 등 실비변상적 급여 비과세 한도를 물가와 연동시켜 정기적으로 상향조정하고 근로자들의 보험료 지출에 대한 세금혜택을 보다 폭넓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 세수가 걱정된다면, 이런 부분을 현실화해 세금혜택을 늘려가면서 정책목적이 소진된 신용카드 소득공제 등을 점진 축소 또는 폐지한다면 제도 개편으로 인한 근로자 계층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홍성일 전경련 금융조세팀장은 이와 관련해 "그동안 과표나 공제한도가 물가상승과 연동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며 "점심값만 해도 물가가 많이 올랐는데 공제한도는 월 10만원으로 십 여년 넘도록 고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홍 팀장은 "현재는 기재부에서 필요할때마다 조금씩 올려주는 형태로 제도가 개편되다보니 부정기적이고 물가와도 연동이 안된다"며 "매년 인상하는 것이 세법상 불안정성을 초래한다면 적어도 5년에 한 번 정도는 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 : 이희정, 이현재, 강상엽, 류성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