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미․일 신밀월', 중․일 정상회담, 계속 악화되기만 하는 한․일 관계 속에 한국의 외교적 고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의회연설을 가리켜 "새롭게 강화된 미·일 동맹과 중국 사이에서 대한민국의 생존전략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던 연설"이었다고 여당 원내대표가 문제를 제기할 정도다.
아베 연설에서 식민지배·침략 등 과거사 사죄는 없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방청석에서 지켜보는데도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재무장과 집단자위권 행사 등 강화된 미·일 동맹을 배경삼아 마이웨이 행보를 가속화하고 미국은 이런 아베에 '최고의 의전(儀典)'으로 화답했다.
8월에 나올 '전후(戰後) 70년 담화'도 이번 연설 수준에서 머물 것이 분명해졌다. 아베는 귀국길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70주년 담화내용과 관련, 전쟁 반성과 전후 일본의 평화국가로서의 행보, 앞으로 지역과 세계에의 공헌에 방점을 둘 것임을 거듭 시사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적 역할 강화에는 미국의 비용 절감과 보통국가화를 원하는 일본의 이해가 딱 들어맞는다. 궁극적 목표인 대중국 견제까지 도모할 수 있어 미·일 동맹 강화와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어차피 필연이고 외교방정식에서 이미 상수(常數)가 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사 프레임에 갇혀 재무장을 반대하고 '위안부 우선 해결' 원칙을 고수하며 정상회담은커녕 양국 정부 간의 의미 있는 협력조차 거부해 왔다. 뒤늦게 과거사와 안보를 분리하는 투 트랙으로 돌아섰지만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이미 좁혀진 뒤였다.
한․미동맹은 한․미 양자관계를 넘어 한․미․일 삼각동맹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한·일 간 불협화음은 미국으로서는 불편하고 어떻게든 양국 간 화해를 원하는 입장이다. 박근혜 외교라인은 이를 지렛대 삼아 한·일의 불화 원인이 아베 정권의 과거사 왜곡인 만큼 미국이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한·일 간에 마찰이 생기면 워싱턴으로 달려가 일본을 압박해 주도록 요청하는 게 우리 대일 외교 전략의 큰 줄기였다. 문제는 이런 우리의 전략이 통하지 않음이 현실로 입증된 데 있다. 언젠가는 일본이 굽히고 들어올 것으로 보고 국제여론전으로 밀어붙여왔지만 아베의 일본이 달라지거나 달라질 전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역대총리 담화의 계승'과 '전쟁에 대한 통절한 반성', '깊은 뉘우침', '아시아 여러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겼다' 것 이상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아베는 미국·일본·인도·호주를 묶는 민주적 '다이아몬드 동맹'을 추구하면서 한국을 배제시켰다. 한국을 '전략적 관계' 국가가 아니라 '협력대상국'으로 꼽으면서 아세안 국가보다 뒤쪽에 놓았다. 한국에 대해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중요한 나라' 표현을 삭제한 '일본 외교청서'의 연장이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과거'보다 '미래'를 중시하며 일본에 사실상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 방문 전 미국 내에서 일었던 비판이나 사과 요구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음이 증명됐다.
한국 언론들이 일부 미국 의원·언론의 일본 비판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아 워싱턴에 반일 정서가 팽배한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얘기다. 아베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제스쳐를 보여도 한국 언론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지가 없어 보이고, 사과를 받는 한국 쪽이 '끊임없이 골대를 움직이고 있다'는 비판마저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우리와 영원히 보조를 맞출 것 같았던 중국이 발을 빼는 듯한 모양새는 더 없는 충격이다. 중국과 일본은 베이징과 반둥에서의 두 차례 정상회담으로 험악한 관계를 일단 봉합했다. 양국 관계가 급격히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중국은 일본과의 관계를 '대결 모드'에서 '관리 모드'로 바꾸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의 입만 쳐다보며 우리 외교가 일본의 '종속변수'로 갇혀있는 사이에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는 낮아지고, 그 '불통외교'에 따른 경제적 피해도 날로 가시화되는 상황이다.
미국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한국은 중국의 눈치를 보며 타결이 임박해서야 협상에 들어가려다 미국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앞으로 가입하려면 쌀시장 추가개방 등 더 비싼 입장료를 각오해야한다.
일본 기업들이 TPP에 가입하는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누적 원산지를 활용해 미국으로 수출시장을 확대시킬 경우 지난 10여 년간 한국이 구축해 놓은 FTA 연결망의 이점은 한 순간에 무력화될 수도 있다.
아베 총리의 발 빠른 대미 외교로 한․일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박 대통령이 6월 미국을 방문할 때까지도 한․일 정상회담 개최를 계속 거부한다면 아베의 역사관이 아니라 한국의 고집이 문제라는 인식이 더 커질 우려도 다분하다.
물론 일본에 부정적인 국민정서를 감안한다면 정부가 유연하게 움직일 공간은 많지 않다. 그러나 국민 정서에는 책임이 없지만, 정부는 문제를 풀 책임이 있다. 일본이 뭘 해도 한국은 어차피 비판만 할 것이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일본 내 분위기도 감지된다. 우리의 주장이 틀려서가 아니라, 통하지 않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다.
일본의 잇따른 역사 도발과 과거사 부정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66.6%)이 '한일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한일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70.1%)는 의견도 반대의견의 3배가 넘었다는 여론조사(동아일보․아산정책연구원 공동조사)도 있다. '아베는 밉지만 언제까지 원수처럼 등 돌리고 살 수만은 없지 않느냐'는 공감대가 국민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피해자인 한국의 대통령이 아베를 피해 다닐 이유가 없다. 메르켈 독일총리와 일부 미국 국회의원들의 발언만 열렬히 해석하며 세계가 모두 우리를 편드는 것으로 착각하고 일본의 변화만 기다리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과 독일, 영국과 프랑스간의 과거사는 한․일관계보다 더 복잡하고 원한이 맺혀있지만 그들이 서로를 폄하하는 일은 보기 어렵다. 과거를 잊어서도, 완전히 용서 해서도 아니고 감정보다는 이성, 대립보다는 화해가 서로에게 더 이익이라는 것을 냉철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오늘의 유럽연합(EU)도 그래서 가능했다.
친구는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되지만 이웃나라는 등을 돌리고 살 수가 없다. 박근혜대통령은 4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과거사는 분명히 짚되 매몰돼서는 안 된다"고 주문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통령의 '논평'이 아니고 외교 '불통'을 뚫는 전략적 결단과 리더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