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은 한국외교에 해답보다는 물음을, 성과보다는 더 큰 부담을 안기고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의전과 예우, 천안문 성루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오른쪽 세번째 자리에 선 우리 대통령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언론과 국민들은 ‘한·중 신(新)밀월 시대’가 도래했다고 들뜬 반응들을 보였다.
하지만 열병식에서 중국의 ‘군사굴기’를 목도한 박 대통령의 심경은 결코 편치 않았으리라. 각종 첨단무기가 동원된 70분간의 열병식은 글로벌 파워로 부상한 중국의 군사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된 이벤트였다.
이날 선보인 신무기 가운데 특히 미국이 주목한 것은 항공모함 킬러 ‘둥펑(東風)-21D’미사일이었다. 미국의 해군전략은 항공모함이 그 바탕인데 중국이 모델번호까지 감추지 않으면서 이날 이를 전격 공개한 것이다. 시진핑의 미국방문을 앞두고 미국의 항공모함 해상패권이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경고메시지로 미국은 해석하고 있다.
한국은 그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넘겨주며 주한미군에 방어 전력의 상당부문을 의존하고 있는 처지다. 그래서 “대북 레버리지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중국과 협력하려고 하는 한국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을 가장 마지막으로 침공한 나라이면서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고 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의 열병식을 참관한 것은 박 대통령이 추구하는 평화와 안정, 통일을 추구하는 정책과 맞지 않는다”는 미국 측 비판은 뼈아프다.
게다가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이 중국의 대북 전략을 바꿀 수 있을지 불투명하고, 오히려 한국외교의 방향에 의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문제제기다.
박 대통령이 중국에 가 성취하고자 한 목표가 바로 북한 문제 해결의 틀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 주석과의 만남에서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북핵 포기’를 ‘한반도 비핵화’라고 돌려 말하던 중국의 기존 어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 주석은 북한을 지칭하지 않고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어떤 행동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긴장 고조 반대’와 “한중은 세계평화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시 주석 발언 역시 북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에 대한 경고뿐 아니라 고고도미사일(THAAD·사드) 배치 등 미국의 대(對)중국 포위망에 한국이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함의로 해석될 수 있다.
한중 정상이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에 의견을 같이했지만 이 회담이 동력을 잃은 것은 북한이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일은 6자회담 재개의 전제로 북에 핵 활동 동결 등을 요구하고 있고, 북은 핵 포기에 관한 회담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계속 평행선이다.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 한국이 ‘조속한 평화 통일’을 강조한 반면 중국은 종전과 다름없이 ‘장래에 한민족에 의한 평화 통일’을 지지했다. 중국의 태도는 외세 즉 주한미군 없는 남북통일을 원한다는 북한 주장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시 주석의 ‘선물’로 박 대통령이 한국이 얻은 것이 있다면 2012년 이후 중단된 한중일 정상회의를 다시 열기로 한 것 정도다. 하지만 3국 정상회담이 재개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중국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안보법제를 불쾌하게 생각해 아베정권이 안보법제를 통과시킨다면 3국 정상회담 개최 전망은 밝지 않다. 게다가 한일정상이 지난해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미국을 끼고 만난 데 이어 다시 중국을 끼고 어색하게 대면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 한중일 정상회담 기회를 빌려 한일 정상회담을 마지못해 가지려는 발상은 너무도 주체성이 없고 떳떳치도 못하다.
북·중 관계가 최악이지만, 중국이 북한의 전략적 자산 가치를 포기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반도정세의 안정과 평화통일을 진정 원한다면 박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북·중 관계 개선을 권하는 등 북한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었어야 했지만 관성에 젖은 압박메시지만 보냈다. 이런 한중공조는 오히려 북한을 자극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진정성을 더욱 의심받게 만든다.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은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소극적 줄타기 외교에서 벗어나 우리의 주도적 노력으로 동북아에서 한국의 외교 공간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 하지만 큰 틀의 외교 책략 없이 개인적 친분만으로 한국의 국익을 지켜내기는 어렵고, 시진핑의 ‘매력공세’에 취해 국제사회에서 중국 굴기의 들러리처럼 비치는 것은 한국 외교의 자멸(自滅)을 재촉하는 길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의 한·미 동맹 최우선 정책은 중국의 반발에 직면해 최악의 한·중 관계로 귀결됐고,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구체적인 성과 없이 최악의 한·미 관계를 빚어낸 악선례가 있다.
이런 시행착오 때문에 기계적인 중립·균형 외교에 나선다면 주변국 모두에 경원시당할 위험이 크다.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싼 역학관계를 ‘한중 프레임과 미일 프레임’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간다면 우리의 균형 외교는 자칫 ‘왕따 외교’로 전락할 수 있다. 중국과 가까워질수록 역설적으로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 관계개선은 그만큼 더 절박해지는 것이 우리의 외교현실이다.
주변국들과의 다양한 협력관계를 통해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려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이를 지렛대삼아 한반도와 동북아 외교의 주도권을 우리가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한중정상회담에 고무돼 박 대통령은 ‘통일외교’에 시동을 걸었지만 평화통일을 위한 한중간 협력도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를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심각한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북한은 ‘한중 밀착’과 박 대통령의 ‘통일외교’에 벌써부터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북한이 ‘비정상 사태’를 도발하지 않도록 세심한 예방외교가 절실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제재와 압박’에서 ‘관여와 동행’으로 대북정책 기조의 전환도 필요하다.
남북관계 개선을 바탕으로 시 주석에게 북한에 대한 압박보다는 관계개선을 주문하고, 내달 한미정상회담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에게 대북정책을 변화시킬 명분을 제공해 북한을 6자회담에 나오게 하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
통일외교의 핵심은 주변열강들의 마음을 사는 일이다. 한일정상회담을 주도하고, 미국과는 양국이 무슨 일을 해도 서로 편할 수 있는 성숙한 단계로 이끌어야한다. 중국의 협조를 얻되 북한을 움직이는 지렛대는 한국이 제 격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50%대로 올라섰다. 설사 ‘종북(從北)’으로 손가락질 받을 일도 박대통령이 하면 지지층은 ‘고뇌에 찬 결단’으로 변함없는 지지를 보낸다고 한다. 임기절반을 갓 넘긴 박대통령의 ‘창조외교’가 시동을 걸 타이밍은 지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