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勞使政)위원회의 9·13 대타협은 노사정이 서로 파국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소중하다.
새누리당은 ‘역사적 결단’, 청와대도 ‘대승적 결단’이라고 이를 반겼다. 당·정·청은 내친 김에 노동개혁5법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한꺼번에 처리한다는 방침을 굳혔다.
하지만 한국노총은 “책임 있는 노동단체가 청년고용과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도 “큰 그림을 그리려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말미를 달았다.
사용자측인 경제5단체는 합의문 의결 직후 공동성명을 내고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개혁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강한 불만을 드러내며 국회를 상대로 입법청원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와 여당의 잇단 압박에 서둘러 합의를 이뤄 냈지만 노사정 모두가 합의내용을 유리한대로 해석하며 새삼 전의(戰意)를 다지는 모양새다. 합의내용이 ‘낮은 수준의 합의’, 엄밀히 말해 ‘앞으로 협의해 합의키로 한 합의’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노사정위의 ‘노동시장 구조개선 합의문’ 내용은 2대 지침 마련과 5대 입법사항으로 구성돼 있다. 2대 지침은 두 핵심쟁점인 저성과 근로자 일반해고 기준과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 기준에 대해 정부가 우선 그 지침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정리해고와 징계해고를 제외한 해고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여기에 저성과 근로자에 대한 일반 해고를 새로 추가한다는 얘기다. 일반해고의 기준 및 명확한 절차에 관한 행정지침을 정부가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되 이 과정에서 ‘정부가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일반 해고에 대해 공정한 근무평가제도를 구축하고 법과 판례에 따라 충분히 협의해 지침을 마련하되 입법화는 중장기적인 과제로 넘겼다.
임금피크제 도입과 관련, 임금체계 개편과 관련된 단체협약및 취업규칙 개정 요건 및 절차를 명확히 하고 이를 준수키로 합의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합의 실천 과정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노사와 충분히 협의를 거친다는 단서가 붙었다.
정부가 지침을 마련하기로 합의를 봤지만 ‘노사가 충분한 협의’를 하도록 해 추후 합의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불씨를 남겼다. 두 핵심쟁점은 처음부터 안건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법제화까지 약속한 것만으로도 큰 양보를 했다는 것이 노조 측 주장이다.
정부는 합의를 봤다는 데 방점을 찍고 있고, 야당은 충분히 협의하겠다는 내용을 강조하면서 ‘밀어붙이기’식 노동개혁 입법을 철회하라고 여당에 다그치고, 협상에 참여하지 않은 민주노총은 ‘노동개악’을 승인한 야합이라 폄하하는 등 여기저기서 전운이 감돌고 있다.
5대 입법사항은 근로기준법, 파견근로자보호법, 기간제법, 고용보험법, 산재보험법 등 5개 법안 개정안의 국회통과를 의미한다. 고용보험법은 실업급여 보장성 강화, 산재보험법은 출퇴근 재해의 업무상 재해 인정이 핵심이어서 노동자에게 유리해 법제화 과정에 별문제가 없고 통상임금 문제도 이미 대법원의 판결이 나와 있어 논쟁의 여지가 크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통상임금 범위를 명료화하기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 파견규제 완화와 파견·도급 기준을 명확화하기 위한 파견법 개정,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파견 확대 등 비정규직 쟁점은 노사정이 공동실태조사, 전문가 의견수렴 등을 거쳐 대안을 마련키로 했다. 하지만 이들 법 개정은 여야 동수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통과는 물론,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본회의 통과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정부 여당은 국회의 입법 난항과 경제회생의 골든타임을 고려해 보다 용이한 정부 지침으로 일단 시행하고 중장기적으로 법제화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첨예한 사안에 대해 지침 마련만으로는 실효성이 없다. 지침 시행과정에서 노조의 불법시위나 투쟁, 소송봇물 사태가 불거질 수 있다.
대타협의 분위기를 살려 노동시장 구조개선으로 이끌려면 사측이 원하는 유연화나 노측이 강조하는 사회적 보호 그리고 정부가 치중하고 있는 청년 일자리를 넘어서는 큰 틀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노동시장 구조개선은 유연성과 안정성 간 단순한 덧셈과 뺄셈 방식으로는 해법이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정부 노동개혁의 핵심은 일반 해고에 관한 규칙과 해고기준을 명확히 해 해고요건을 완화하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 혹은 다양한 편법을 통해 사람을 내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동시장이 경직적이 아니라 실제는 유연한 노동시장이라는 주장도 팽팽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한국의 노조 가입률은 10.3%에 불과한데 이들 때문에 나머지 90%의 아픔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10% 대 90%의 프레임은 기득권 노조압박을 위한 여론전에 불과하다. 진정한 노동정책은 정규직 고용에 대한 보호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90% 비정규직 보호를 높이는 것이 더 옳은 방향이라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임금피크제’가 과연 청년 고용을 증대시킬 것인지에 대해선 경제학자들 간에도 이론이 분분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노사정위원회의 대타협 정신에 따라 각계각층의 고통분담 차원에서 ‘청년일자리펀드’를 마련해 청년 일자리를 지원토록 했다. ‘사회지도층’ 참여로 펀드가 모아지면 청년 취업과 창업을 위한 맞춤형 교육이나 임금 지원 등에 쓸 방침이라고 한다.
취지는 좋지만 이것이 청년 일자리 창출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사내유보금 710조 원을 쌓아 놓고 있는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안 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미래 불확실성 때문이다. 정부가 펀드를 조성하면 기업은 안 낼 수가 없고, 준(準)조세만 늘어난다.
분배구조 악화가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경제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없이 창조경제혁신센터나 청년 일자리펀드 같은 전시성 이벤트로 청년고용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고령화 대비와 청년실업 해소, 경영권과 노동기본권, 대기업과 중소기업, 고임금과 저임금 계층, 임금인상과 일자리 확대 등 상호 모순과 갈등 구조를 해체하고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공정한 노동시장 질서 구축이 진정한 노동개혁 방향이다.
이제 1단계 합의를 정리할 책임은 국회로 넘어갔다. 여야는 정치공학적 셈법을 버리고 우리 노동시장의 미래를 위한 ‘더 큰 합의’를 위한 점진적 개혁입법을 추진해 나가야한다.
노사정위 참여를 거부한 민주노총의 주장 가운데 합리적 제안은 이를 수용하는 아량도 필요하다. 일반 해고와 취업규칙 요건의 두 핵심쟁점보다 더욱 중요한 과제는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개선이다. 이는 미완의 과제로 넘겨진 상태다. ‘낮은 단계의 합의’에 우쭐하거나 섣불리 축배를 들 때가 아니다. 노동개혁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