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동북아외교가 제 철을 만난 것인가. 2012년 5월 이후 중단됐던 한․중․일(韓․中․日)정상회담이 지난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동북아 3국 간 최고위협의체가 3년 반 만에 재가동된 것이다.
하루 전인 31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과 리커창(李克强) 중국 국무원 총리는 청와대에서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어 리커창 중국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리 총리가 묵고 있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중․일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2일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간에 한․일 정상회담이 3년 반 만에 청와대에서 열렸다. 우연의 일치이긴 했지만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는 시각에 서울 국방부에서는 한국과 미국 국방장관이 연례 한미안보협의회(SCM) 회의를 열고 한반도 유사시 북한 핵과 미사일을 파괴하는 ‘4D 작전계획’ 수립을 공식 천명했다. 한반도의 서울이 졸지에 동북아 외교․안보격랑의 한 가운데 선듯한 긴장감도 감돌았다.
한·중·일 3국은 필리핀에서 1999년 11월에 열린 제3차 ‘아세안+3’ 정상회의를 계기로 별도로 모임을 갖다가 2008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정상급 회의를 출범시켰다. 일본에서 1차 회의가 열린 후 3국이 번갈아 매년 개최해 2012년 5월 제5차 정상회의까지 계속됐다.
3국 정상회의가 이후 재개되지 못한 배경은 중·일 전략 갈등이다. 2012년 9월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 국유화 조치를 하면서 중·일 관계가 급속히 냉각됐다. 그해 말 등장한 아베 신조 총리는 중국의 부상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고, 2012년부터 본격화한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에 적극 부응하면서 갈등이 증폭됐다. 한·일 역사 갈등은 그 부수물이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3국의 만남을 이루어낸 데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에 참석하면서 미국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약속했고 그 일환으로 서울에서의 3국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중국은 박 대통령을 베이징 전승절 기념식에 꼭 오도록 해야 했고 3국 정상회담 참석으로 이에 보답했다. 중국은 3국 회담보다 한·중 회담에 무게를 두는 입장이었다.
일본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중·일보다는 한·일 관계가 우선이었다. 한·일 관계 개선을 다그치는 미국 요구에 일본이 성의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중·일은 서로 간에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데도 정치와 안보 면에선 갈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다.
이번에 3국 정상은 ‘동북아평화 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을 채택했지만 과거사와 일본군 위안부 남중국해 문제 등 ‘갈등이슈’는 비켜갔다. 북한 비핵화문제도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고수하는 등 온도차를 보였다. 과거사와 영토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어온 3국이 정례적 정상회의개최 등 대화 창구를 복원키로 한 것이 가장 큰 성과로 꼽히는 상황이다.
중․일간의 별도 양자회담에서는 역사인식과 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리커창과 아베 간에 설전이 길어져 박대통령 주최 만찬이 늦어지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반면 한·중 정상회담은 시종 화기애애했다. 리 총리가 중국 경제 총책임자인 만큼 한·중 FTA와 금융 협력은 물론이고, 만중창신(萬衆創新)과 창조경제, 일대일로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공통분모 찾기 등 경제적 논의들이 풍성했다.
하지만 북핵문제에서 중국의 미묘한 변화도 감지됐다. 중국 외교부는 한․중 정상회담 발표문에서 ‘한반도 평화․안정’이라는 문구를 북한 비핵화보다 앞세웠다.
뿐만 아니라 ‘한․중 간 해양경계획정’회담을 재개하자고 요구했다. 이어도와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둘러싼 한중 갈등을 예고한다. 청와대의 양국 정상회담 발표에선 이 대목이 공개되지 않았다.
3년 반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공동발표문도, 기자회견도, 오찬도 없는 썰렁한 만남이었다. 박대통령은 ‘신뢰’를 강조하고 아베는 ‘미래’에 방점을 찍었다. 최대 현안인 위안부문제 조기타결을 위한 협의에 속도를 내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타결내용과 시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우리 측은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법적책임과 배상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끝났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확고한 방침이다. 다만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민간기금 차원의 보상을 하고, 한국에 대해 위안부 동상 철거와 함께 ‘최종적인 사과’라는 확답을 얻어내려 하고 있다.
양측을 동시에 만족시킬 방안은 쉽지 않지만 두 정상이 위안부문제 해결의 필요성에 공감해 협의를 가속화시키기로 한 것은 양국 관계복원을 위한 소중한 단초로 받아들여진다.
한․일 관계는 이제 양국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미국은 한미일 3각 협력 복원을 아시아 재균형전략의 핵심요소로 삼고 있고, 한국도 일본과 협력이 필요한 분야가 많아 양국관계를 언제까지 과거사 틀 안에 묶어둘 수는 없다.
우리 입장에서 미·일과 힘을 합쳐 북한 위협에 대처하고, 한반도 통일에 대비해 중국의 협조를 구하려면 한·중·일과 한·미·일 협력 체제를 함께 유기적으로 가동해 나갈 수밖에 없다.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한·일 안보협력은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일본 자위대가 유사시 한반도에 진입할 수 있는가도 민감한 사안이다. 일본 방위상이 “한국 지배가 유효한 범위는 휴전선 남쪽”이라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고, 미국 국방장관이 서울에 와 일본 측 입장을 두둔하는 발언을 해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우리정부의 입장은 ‘국제규범에 따른 평화적 해결’이다. 하지만 한미국방장관 회담에서 한민구 국방장관은 “남중국해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자제할 것을 국제사회에 촉구해왔다”고 한 발 더 나갔고, 카터 미국방장관은 “한 장관이 우리의 입장을 잘 요약해 줬다. 지금하신 발언이 대한민국의 원칙일 뿐 아니라 전 세계 국가들의 원칙이며 여기에 미국도 포함된다”며 중국에 각을 세웠다.
동북아 외교 안보 격랑 속에서 한국외교의 방정식은 제로섬이 아닌 고차원 방정식으로 갈수록 복잡화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동북아는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에 이르는데도 국가 간 분쟁을 다룰 다자협력 체제가 역내에 없다.
한․중․일이 3국정상회담의 정례화로 ‘한 배’를 타긴 했지만 그 속내는 각각이다. 각자도생하며 치열한 외교전쟁에서 국익을 지켜내야 한다. 한미관계가 궤도에 오른 계기비행이라고 방심하거나 한중 ‘밀월’에 들떠 있을 때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