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국정농단사건으로 온 나라가 패닉에 빠져있다. 대한민국의 국가명예가 먹칠당하고 국민들의 자존심이 온통 구겨졌다. 국격(國格)의 실추와 함께 한국경제에 대한 대외신인도가 악영향을 받고 동맹국들의 신뢰도 무너지고 있다.
헌정위기를 넘어 경제위기의 먹구름은 언제라도 한국경제를 덮칠 기세다. 대통령의 손발 노릇하던 '문고리 3인방'과 핵심참모들이 물러나면서 '박근혜식 비선(秘線) 통치시스템'이 붕괴됐다. 물러난 정무수석이 “외롭고 슬픈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달라”고 기자들에게 호소할 정도로 대통령의 심기는 '멘붕'상태다. 공직자들은 충격과 허탈 속에 복지부동이다.
이 상황에서 북한이 도발하거나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하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아들 비리와 노동·금융관계법 파동으로 큰 타격을 입은 지 몇 달만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북한이 또 한 차례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탄 발사와 같은 전략적 도발을 한다면 미국의 정권교체기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대선은 일주일 이내로 다가왔다. 누가 되던 미국이 북핵 폐기를 포기하고 북한과 핵동결 협상에 들어갈 가능성도 배제 못하는 상황이다.
중국 매체와 인터넷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희대의 정치드라마를 전문번역 수준으로 낱낱이 퍼 나르며 한 때 친근감을 담아 '다제(大姐·큰누님)'라 부르던 박 대통령의 호칭을 '다마(大媽·아줌마)로 격하시켰다.
환구시보는 박대통령의 최근 2년간 외교정책이 “충동적이고 정서에 좌우되는 경향을 보였다”면서 “최순실 영향이 아니었겠느냐”고 조롱 투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등 주요 해외매체들도 비선실세와 정실인사에다 사이비종교와 굿판 등 충격적 뒷얘기들로 박대통령의 권위가 파산 선고를 맞았다며 향후 대외정책이 구심력을 잃을 것을 우려했다. 대통령이 내치(內治)는 물론 외교에서도 힘을 못 쓰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최순실 게이트'가 아니라 본질상 '박근혜 게이트'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전 정권에선 대통령의 가족이나 측근이 비리를 저질렀고, 대통령이 나서서 수습을 했다. 그러나 이번엔 국가 시스템이 무너졌고 대통령이 '몸통'이다.
국정 일부를 검증도 안 된 민간인에게 의지한 것도 화가 나는데 대통령의 사과마저도 석연치 않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국기문란 행태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들에게 분노와 자괴감과 참담함을 안겼다. 10%대의 지지율과 '하야' '탄핵'요구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해도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고, 공직자들을 이끌어가기도 힘들게 됐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참모들과 각료들의 제안과 조언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참모나 각료는 지시의 대상이지 대면보고 등 협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예측 불허의 인사 행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정국 운영의 큰 그림을 그려주고, 정책의 주된 가닥을 잡아주는 배후, 혹은 주변인물이 누구인가가 항상 궁금했었다. 놀랍게도 그 막후 실세는 박 대통령이 “어려웠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 그 부친인 최태민씨와의 깊은 인연을 고리로 대를 이어 온 최순실과의 특수 관계였음이 이번에 백일하에 드러났다.
여기에는 대통령의 일탈을 방조하고 아무런 견제도 하지 못한 청와대의 참모들이나 각료, 집권당의 책임도 크다. 여권 지도부 사퇴는 물론 친박, 비박 모두 해체가 마땅하다.
권력의 독선과 일탈을 방치하고, 이념적 편 가르기 속에서 오히려 이를 부추겨 온 다수의 언론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고질적이고 거대한 부패구조 속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는 곳곳이 지뢰밭이다. 조선·해운업을 비롯한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여전히 윤곽조차 그리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다. 13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의 뇌관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강남 3구를 중심으로 달아오르고 있는 부동산시장은 또다시 거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리더십이 확고한 정부도 헤쳐 나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박근혜정부의 현오석 초대 경제부총리는 기업·산업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허송했다. 최경환 부총리는 시급한 구조조정 대신 돈 풀어 부동산 띄우기 성장으로 오늘의 진퇴양난에 일조했다. 현 유일호 부총리는 경제 총사령탑으로서의 리더십은 커녕 무능력과 무기력이 도를 넘었다. 집권4년 가까이 단기처방을 반복하며 경기를 띄우려다 강남 부동산만 과열시킨 결과가 됐다.
안보와 경제가 복합 위기에 빠져 있는 가운데 대통령의 정치적․도덕적 기반은 무너졌다. 남은 1년 4개월을 허송하면 나라경제가 회복 불가능의 치명상을 입을 수 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청와대와 여권은 청와대 참모진 교체→총리 교체→총리와의 협의를 통한 개각으로 이어지는 인적 쇄신을 통해 사태 봉합을 시도하려 하지만 분노한 민심을 달래는 특단의 조치 없이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박대통령의 결단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모든 걸 다 내려놓겠다는 진심 어린 대국민 참회가 필요하다. 언론 보도가 일부 부풀려진 것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만으로도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대통령의 잘못과 그 책임, 농단당한 국정의 범위가 어디까지이고 동조한 이들은 누구인지 철저한 진상규명이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대통령이 진솔하게 본인부터 조사 받겠다는 의지를 갖고 성역 없는 수사를 공개적으로 천명해야한다.
외교 국방 등 헌법상 불가피한 대통령의 권한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국회와 내각에 넘기고, 새누리당 탈당과 함께 내년 대선에서 중립적 관리 역할을 천명해 진정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최소한의 국민적 지지를 유지하며 임기를 끝낼 수 있는 길은 그 길뿐이다.
거국 중립내각이 됐던 책임총리제가 됐던 여야 정치권이 정파를 초월한 협의와 타협으로 국정공백을 최소화해야 한다. 국면전환을 위한 '꼼수'나 내년 대선을 의식한 정략으로 맞설 경우 국정마비와 국가적 위기를 자초할 뿐이다.
우리 경제는 저출산․고령화와 장기 저성장의 터널 속에 수출 생산 투자 소비 모두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4분기 마이너스성장마저 우려되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산업재편, 구조개혁 정책을 여야 합의로 이루어내는 일도 시급하다. 당리당략을 따지며 시간을 끌 때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