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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근 칼럼]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하여

조세일보 / 변상근 논설고문 | 2018.03.07 08:30

오는 7월부터 근로자 300인 이상 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은 대망의 '칼퇴근'이 가능해 질 모양이다. 근로시간 단축에 대비해 매일 오후 6시가 되면 모든 직원의 컴퓨터가 강제로 꺼지는 PC오프제를 도입하는 회사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를 쓰려면 야근이 필요한 정당한 사유를 대고 부서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니 한국판 '나인 투 파이브'(9시부터 5시까지)라고나 할까.   

직장인들은 남는 시간을 어학을 배우거나 운동을 하는 등 자기개발에 쓸 수 있고,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하는 일도 많아져 '저녁이 있는 삶'과 함께 이른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합의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주당 68시간이던 법정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근로시간을 갖고 있다. 5년의 논의 끝에 '과로사회'의 딱지를 떼게 된 것이다. 남들 놀 때 안 놀고, 남들 잘 때 안자고, 남들 쓸 때 안 쓰며 악바리로 살아온 우리의 '일벌레' 근로문화에 획기적인 변혁이다.

변혁의 첫 단추는 14년 전 주5일근무제 도입이었다. 2004년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해 주 44시간이던 법정근로시간을 40시간으로 줄였다. 이에 따라 오전에 4시간 일하고 오후에는 쉬는 반공일(半空日)이던 토요일을 아예 휴일로 바꿨다.

당시 노동계는 “근로시간 단축은 의미 있지만, 임금이 줄어들어선 안 된다”고 우려했고, 경영계는 “근로시간 단축은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인건비 상승으로 기업경쟁력이 약화되고 중소기업 줄도산사태가 난다”고 극력 반대했었다. 노사가 우려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고 주5일제는 이제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제도로 우리사회에 자리 잡았다.

2004년 당시는 법정근로시간이 4시간 줄어드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연장근로를 포함한  근로시간이 최대 16시간이나 줄어든다. 현행법상 법정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지만 주 12시간까지 연장노동을 할 수 있어 연장근로를 포함한 노동시간은 총 52시간이다.

그럼에도 실질적으로는 1주일 최대 68시간 노동이 가능했다. 노동부가 휴일노동은 연장노동시간에 포함하지 않는다고 행정해석을 내려 추가로 휴일(토·일) 8시간+8시간 더 일을 시킬 수 있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주 40시간 노동이 법으로 정해졌음에도 한국이 멕시코 다음으로 장시간 노동하는 나라가 된 연유도 이 때문이다.

이번 근로시간 단축은 주 5일제 시행 당시보다 사회적 충격이 훨씬 클 법하지만 주 68시간을 일하는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고, 대다수는 53, 54시간 안팎으로 일하기 때문에 실제 근로자의 근로시간은 1, 2시간 줄어들게 돼 충격은 그리 크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휴일근로에 대한 중복할증을 인정하지 않고 현행대로 통상임금의 150%를 지급하도록 했다. 아울러 무제한 노동이 가능하도록 허용하는 특례업종을 26개에서 5개로 축소하기로 했다.

저성장시대의 일자리 확충을 위해서라도 노동시간 단축은 절실하다. 줄어든 근로시간을 보충하기 위한 신규 채용이 촉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당 법정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면 60만~70만개의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당장 기업 부담이 커진다. 대체인력 추가 고용, 휴일 근로가산 지급 등에 따른 추가부담이 12조3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한국경제연구원은 추계했다.

대기업들은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어 괜찮다고 해도 문제는 중견·중소기업이다. 추가 비용의 70%를 이들 중소기업이 떠안게 될 판이다. 업종이나 직종에 따라 근로시간을 두부모 자르듯 구분할 수 없는 사업장도 부지기수다.  

근로자 입장에서도 “야근, 특근이라도 해야 아이들 학원비라도 간신히 대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직원보다는 저임금을 받는 중소·영세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의 상대적 소득감소가 더 크다는 게 문제다. 소득 양극화가 더 심화될 수 있다.

휴일근로 중복 할증 200%를 주장해 온 민주노총은 즉각 “근로기준법 개악”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일자리 나누기란 대의를 생각한다면 노동계 입장만 고집할 수는 없다. 높은 할증률은 초과근로를 유인하는 측면이 있어 근로시간 단축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실업자가 100만 명을 넘었고 청년실업률은 외환위기 수준이다. 덜 일하고 임금을 적게 받더라도 일자리를 나누려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근로시간 단축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문제는 생산성을 높이지 않고 근로시간만 줄인다면 기업경쟁력도, 근로자 삶의 질도 나빠진다는 점이다.

그간의 장시간 노동은 노사 간 일종의 묵계였다. 근로자들은 높은 할증률을 적용한 초과근로 수당을 선호했고, 기업은 수당을 높여 주더라도 사람을 더 뽑는 것보다는 낫다는 입장이었다. 직장인 역시 야근과 휴일근무를 당연시했던 업무 관행과 직장문화에 젖어왔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선진국 가운데 중하위권이다. 생산량 감소 없이 근로시간을 줄일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든 효율과 창의성을 높이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우 법정 근로시간이 줄면 추가 비용도 문제지만 인력난은 더 심각해진다. 이참에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인력난을 줄일 근본대책을 세워야 한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등 유연근무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활성화하고 경직된 노동시장도 유연화 해야 한다. 일이 많은 시기에 근로시간을 늘리고 일이 적을 때 근로시간을 줄여 월 기준으로 법정 근로시간 총량을 맞추면 기업의 부담은 한층 줄어든다.

유연근무를 도입한 기업은 미국이 81%, 유럽 66%지만 국내 기업은 12.7%에 그친다. 현재 최대 3개월까지 허용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1년으로 늘리는 등 확대조치가 필요하다.

근로시간을 줄인다 해놓고 각종 꼼수와 편법이 판을 칠 것이라는 우려도 벌써부터 나온다.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가져가 야근을 할 경우 무늬만 '저녁이 있는 삶'이 될 수도 있다.     실질적인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선 잔업규제를 강화하는 등 단기적으로 근로관리를 확실히 하고 고용창출 장려금 제도 등 현행 지원책을 52시간 근무제에 맞춰 더 정교하게 짤 필요가 있다.

근로시간이 줄어든 만큼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업과 종업원의 노력이 함께 뒷받침 될 때  '저녁이 있는 삶'도 현실화 할 수 있다. 노동유연성을 확보하면서 일자리도 늘리는 선(善)순환의 노동개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변상근 논설고문

[약력]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한양대 겸임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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