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 혐의를 받고 있는 한진그룹 총수일가에 대한 관세청의 압수수색이 계속되고 있지만 제보와 여론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졸속' 압수수색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물론 이들의 잘못은 법과 원칙에 따라 '일벌백계(一罰百戒)'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법무부와 경찰 등 수사기관들이 이들을 소환조사하는 과정에서 여론을 의식, '망신주기' 수사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관세청도 이에 뒤질세라 피의자 인권과 주주 권익은 안중에도 없는 듯 압수수색을 남발하는 것은 추후 권한남용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압수수색 결과가 신통치 못할 경우 뒤따를 비판도 관세청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이에 일각에선 관세청이 어떻게든 실적을 내기 위해 무리한 처분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39년 만의 검찰 출신 관세청장인 김영문 관세청장이 최일선에 나서 한진그룹 총수일가 조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가운데, 수차례 진행된 압수수색 결과와 관세청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6일에 1번 꼴…심지어 했던 곳 재차 압수수색
관세청은 지난 한 달 동안 한진그룹 총수일가에 대한 압수수색을 5번이나 실시했다. 관세청이 재벌 총수일가를 직접 타게팅해 압수수색한 것도 지극히 이례적인 일인데, 6일에 1번 꼴로 압수수색을 벌인 셈이다.
첫 압수수색은 지난달 21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등 총수일가의 자택 3곳과 인천공항 제2터미널 내 대한항공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어 불과 2일 뒤인 지난달 23일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대한항공 본사 전산센터와 중구 소재 한진관광 사무실, 김포공한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지난 2일 실시된 세번째 압수수색은 첫번째 압수수색 장소였던 총수일가 자택에 대한 중복 압수수색이었다. 자택에 '비밀의 방'이 있다는 제보에 따른 것.
당시 관세청은 압수수색을 통해 비밀의 방을 확인했지만 "안타깝게도 물건을 이미 치운 것 같다"면서 1차 압수수색에서 자신들이 놓친 부분을 시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차례 압수수색에도 불구하고 밀수에 대한 입증이 쉽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가자, 관세청은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총수일가를 압박했다. 1만 달러가 넘는 돈을 해외로 가져가려면 세관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의심'에서였다.
외국환거래법 위반에 따른 관세청의 4차 압수수색은 지난 16일 진행됐다.
가장 최근 벌인 5차 압수수색은 경기 일산에 위치한 대한항공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관세청은 현력업체에 대한 압수수색 결과 총수일가의 밀수품으로 추정되는 현물 2.5t을 발견했다고 밝혔다.28일 관세청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관세청은 대한항공 직원 등 참고인들을 소환해 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참고인 조사가 끝나는 대로 총수일가도 소환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압수수색이 '장난'도 아니고…
관세청이 밀수품으로 추정되는 현물을 발견했다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온 것은 없다. 관세청은 아직까지도 발견된 현물에 대해 "구체적인 물품은 확인해 줄 수 없다"며 "조사 중"이라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일각에선 신중하고 꼼꼼하지 못했던 관세청의 압수수색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검찰 출신 관세청장의 지휘 아래 마치 검찰로 빙의라도 된 듯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지만 빈수레만 요란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관세청은 1차 압수수색에서부터 언론 등에 압수수색 사실을 퍼뜨리고, 평소 언론 노출을 꺼리는 모습을 보였던 관세청장이 직접 라디오 방송에 출연, 밀수에 대한 제보를 요청하는 등 언론을 적극 이용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조사가 지지부진 길어지자 관세청의 압수수색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 일각에선 관세청이 '압수수색은 필요 최소한의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압수수색의 기본 원칙을 무너뜨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무리 '물컵 갑질' 등 한진 총수일가의 여러 잘못이 국민적 공분을 살만한 행동이라고 하지만 피조사자에 대한 강제처분 중 하나인 압수수색을 마치 '현장실습' 나가 듯 하는 관세청의 행태는 권한남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우려는 관세청 내부에서도 제기된다.
한 관세청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다 보니 압수수색이 과도하게 집행된 측면이 있다"며 "관세청이 이 같이 떠들썩하게 압수수색을 벌인 적은 지금껏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론을 의식한 조사인 만큼 성과가 나와야 되는데, 이에 따라 무리한 처분이 나올 가능성도 크다. 관세청장도 이 부분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포토라인 고민하는 관세청…'망신주기'도 동참?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는 지난 1일 경찰 포토라인에 섰다. 광고대행사 직원이 대답을 못했다는 이유로 물을 뿌렸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24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필리핀 도우미 불법고용 혐의로, 28일 이명희 한진그룹 이사장은 폭행 등의 혐의로 각각 경찰 포토라인에 섰다.
한진그룹 총수일가를 소환해 줄줄이 포토라인에 세우는 것에 대해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꼴좋다', '시원하다', '자업자득이다'라는 반응도 있는 반면, '마녀사냥이다', '혐의에 비해 과도하다'라는 반응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것.
조만간 한진 총수일가를 소환할 방침인 관세청도 포토라인 설치 여부를 두고 한창 고민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관세청 관계자는 "한진 총수일가 소환 일정은 아직 정해지 않았지만 소환할 경우 관세청도 포토라인을 설치하게 될 것 같다. 그동안 관세청에 포토라인을 설치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관세청도 포토라인에 한진그룹 총수일가를 떡하니 세울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뒷말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관세청 관계자의 말처럼 아직 밀수 의혹만으로 관세청에 포토라인을 설치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최근 포토라인은 형평성 문제를 일으키고 무죄추정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연쇄살인 등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긴급 사안도 아닌, 밀수 의혹과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불법채용했다는 혐의만 가지고 포토라인에 피의자를 세워놓고 미리 '인민재판'할 필요가 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형평성 문제 등을 제거하려면 한진그룹 총수일가 외에도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불법고용하거나 무심결에(?) 명품 등을 그냥 들고 들어오는 일반국민들을 모두 밀수 혐의를 적용해 포토라인에 세워야한다는 비아냥 섞인 지적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한 관세청 관계자는 "밀수 혐의로 포토라인에 서게 된다면 다른 밀수 혐의를 받고 있는 이들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며 "아무리 한진 일가의 잘못이 많다고 하지만 법과 원칙에 맞게 처리하면 된다. 압수수색도 그렇고 조용히 일처리를 해오던 관세청이 요즘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