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일보

글자 크기조절

글자 크기가 적당하신가요?

[변상근 칼럼]

누가 보수를 궤멸시켰나?

조세일보 / 변상근 논설고문 | 2018.06.20 08:30

6·13 지방선거는 보수진영에 대한 국민의 탄핵이었다. 자유한국당은 수도권과 PK(부산·경남)를 더불어민주당에 내주며 'TK(대구·경북)당'으로 전락했다.

국회 30석의 바른미래당은 광역·기초단체장을 하나도 못 건졌고, 기초·광역의회 당선인 수는 민주평화당·정의당에도 뒤졌다. 두 정당은 지도부가 총사퇴한 가운데 공황상태다.

의원 비상총회에서 자유한국당 김성태 권한대행은 “이번 선거는 국민들이 한국당을 탄핵한 선거”라며 “수구기득권과 낡은 패러다임에 머문 보수가 탄핵당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바른미래당의 김동철 비상대책위원장은 “한국당과의 차별화에 실패하고, 보수야당의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해 한국당 심판에 덤터기로 끼어들어간 측면이 있다”며 선거참패의 원인으로 '보수노선'을 지적했다.

보수의 몰락은 2016년 충격적인 총선 패배로 시작됐고 2017년 대통령 탄핵과 대선 패배로 가속화됐다. 그럼에도 보수정치권은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거듭나기는커녕 정권 발목잡기와 분열 및 내홍으로 내부갈등만 키워왔다.

자신들이 추대한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 있는데도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남북한 정상이 만나고 북미관계에 새 지평이 열리는 상황인데도 여전히 철 지난 반공프레임과 국가주의에 갇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왔다.

한국의 보수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근대 자유민주주의 국가 수립과 산업화 성취에는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이념적·정책적 진화를 이루지 못한 채 냉전시대의 안보관·북한관에 사로잡혀 21세기 한반도 새 질서형성에 발목을 잡는 낡은 세력으로 국민 눈 밖에 났다. 

여기에 보수의 품격마저 갉아먹는 한국당 홍준표대표 체제가 몰락을 부채질했다. 보수층 중엔 '한국당=보수'를 수치스러워하고, “나도 보수지만 이참에 한국당이 폭삭 망했으면 좋겠다'는 탄식들이 저간의 바닥민심이었다.       

작년 대선 패배 이후 보수정치권은 줄곧 분열과 내홍에 휩싸였다. 홍준표 대표는 6·13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 공천 과정에선 자신의 최측근을 유리한 지역에 공천해 사당화 시비를 자초했다. 홍 대표를 견제해야 할 당 중진들은 눈치만 봤고, 초·재선 의원들은 침묵했다.

바른미래당 역시 '개혁보수'란 구호아래 유승민-안철수계가 정체성이 모호한 '한 지붕 두 살림'체제로 대놓고 불협화음만 드러냈다.

문제의식도, 방향감각도 없고 이렇다 할 어젠다도 내놓지 못하니 막말밖에 더 하겠느냐는 자조도 나돌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못마땅한 사람들도 좀처럼 홍준표 대표와 자유한국당을 지지하지 않는 현상도 이 때문이다.  

2007년 대선 이후 친노(親盧)는 폐족(廢族)임을 자처하며 정치권에서 퇴장했지만 지난해 탄핵 이후 친박·친이를 가리지 않고 보수 인사 중 책임을 통감하며 정계를 떠난 이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촛불민심이 박근혜대통령을 탄핵한 데 이어 유권자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 보수진영을 표로 심판한 것이 이번 지방선거다. 

보수의 몰락은 '좌파정권'이 궤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고 자업자득이다. 막말의 홍준표가 보수를 궤멸시켰다기보다는 몰락한 보수가 홍준표체제에 매달리면서 궤멸이 가속화된 측면이 강하다. 

자유한국당 강령은 “국가 안보, 자유와 책임, 공동체 정신, 국민 통합,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 등 신(新)보수의 가치와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가치를 국민과 공유하고 확산시켜 나간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핵심가치인 책임과 희생은 찾아볼 수 없고,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비전을 국민과 공유하기는커녕 아집과 독선으로 어깃장을 놓아왔다.        

그동안 자유한국당의 정치노선과 행태는 보수가 아닌 극우정당에 가까웠다. 의석수만 많았지 태극기부대를 대표하는 대한애국당과 다를 바 없었다. 상대를 공격하고 반대하고 깎아내려야 내가 산다는 '이분법 정치' 속에 '웰빙 정당'으로 군림해왔다. 진정한 보수정당이기는 커녕 산업화·안보·성장 패러다임에 갇힌 기득권세력들이 자기보신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보수'를 표방하고 있을 뿐이라는 분석도 이 때문이다.   

2012년 대선까지만 해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접근과 경제 양극화 해결은 보수와 진보를 관통하는 공통의 비전이었다. 하지만 보수재집권 이후 좌표는 실종되고 냉전적 대결구도와 국가주의가 되레 강화됐다. 보수유권자들조차 남북화해를 열망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도 이들을 대변할 새로운 비전은커녕 오로지 딴지만 거는 수구세력으로 민심의 지탄을 받게 된 것이다.  

궤멸된 보수진영이 절멸(絶滅)을 피하려면 해체수준의 재편이 시급하다. 그 재편은 정당 간 통합 등 정계개편이 아니라 인적쇄신이 핵심이다. 홍준표 전 대표 스스로 “가장 본질적인 혁신은 인적청산”이며 이것이 안 되면 “한국 보수정당은 역사 속에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는가.  

파격적 리더십 교체가 필수적이지만 문제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차세대 지도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능력과 자질보다는 충성파만 챙기는 퇴행적 계파정치가 차기 지도자들의 씨를 말려왔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공천시스템 속에서 외부 수혈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해왔고, 그마저도 '계파 줄세우기'여서 새 인물도 금세 기성정치의 한낱 부품으로 전락되는 패턴을 보여 왔다.

김성태 권한대행은 “기득권 보수가 아니라, 수구 냉전 반공주의에 매몰된 낡은 주장을 스스로 혁파하는 정의로운 보수의 뉴 트렌드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하려면 한국당  해체에 버금가는 수준의 과감한 외부수혈로 당의 컬러를 다양하고 폭넓게 가져가야 한다.

김대행의 '깜짝 쇄신안'에 '누구 맘대로?'라며 내부반발이 드세고, 아직도 '30% 콘크리트 지지층'에 연연하며 총선 때까지 버터기 모드에 들어가려는 기류도 감지된다.

참패에 대한 처절한 반성 없이 보여주기 식 반성퍼포먼스와 공허한 혁신구호만 외치다 지도부사퇴→비상대책위원회 구성→당 대표 선출→혁신기구 구성 등 기존의 '위기대응 매뉴얼'만 되풀이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다음 총선(2020년)까지 참패해야 한국당이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이래서 나온다.

보수의 궤멸은 역설적으로 한국정치의 패러다임 변화를 앞당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보수도 끊임없이 변해야 산다. 자기쇄신으로 시대변화에 맞추어 가치를 부단히 새롭게 해나가야 한다. 비대위 체제로 대충 불을 끄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로 돌아가면 다음총선에서 보수는 아예 절멸될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정말 이번에 죽어서 이 땅의 진정한 보수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변상근 논설고문

[약력]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한양대 겸임교수(현)
[저작권자 ⓒ 조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화끈한 토픽·쏠솔한 정보 조세일보 페이스북 초대합니다.

관련기사

Copyright ⓒ Joseilbo.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