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합격자 발표가 성큼 다가왔다는 신호다.
5년 동안 최종 합격자발표를 경험한 나에겐 공부를 통한 시험실력 뿐만 아니라 기다림에 대한 정신수양도 한층 올라간 기회였다. 어찌나 정신수양이 되었던지 지금도 그 시절들이 생생하다.
2차 시험을 치고 나면 겪게 되는 흐름이 있다. 물론 공부기간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
우선 시험이 끝나고 몇 일간은 전력질주한 뒤의 피로감과 해방감이 밀려온다. 잘 봤든 못 봤든 시험이 끝났으니까.
그리고 난 뒤가 문제다.
시험장에서의 실수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불합격에 대한 불안함보다는 그토록 노력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저 멀리 뿌연 안개처럼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한다. 수험생카페를 들락거리며 듣게 되는 가 답안들로 인해 잠을 설치게 된다. 꿈에서 몇 번이나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고 문득문득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왜 내가 그런 실수를 했을까 라는 자책이 떠오른다.
그런 자책과정이 경우에 따라 길어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념하게 된다. 다시 수험서를 꺼내 학원을 기웃거리기도 하지만 사실 이 단계에서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억울함과 체념과정이 지나고 드디어 발표 날이 성큼 다가오기 시작하면 왠지 모를 기대감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심초사하기 시작한다.
수험생카페에 합격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들로 북적이는 시기가 이때다. 그와 더불어 각종 루머가 난무하기도 한다. 확인되지 않은 합격 컷 점수얘기부터 시작해 제일 당황스러운 것은 발표예정일 며칠 전부터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합격자명단 확인법이다. 대부분은 루머이지만 간혹 시험 관리기관의 실수로 몇 시간 전 사전유출이 문제된 적도 있다.
아무튼 발표를 앞둔 수험생들에게는 특히 어느 정도 합격을 기대할 정도의 공부 량이 된 수험생들에게 하루하루가 살얼음이요. 하루에도 수십 번 천당과 지옥을 넘나든다.
차라리 어떤 결과이든 받아들일 지어니, 이런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덧 발표 날이다.
난 네 번의 연속된 불합격 단어를 보았고, 다섯 번째 결국 합격이란 단어를 만나게 되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얼마나 그 순간들이 힘들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를.
누군가는 사형수의 마음이랑 비슷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내 경우에는 친한 의사 후배로부터 들은 암환자가 겪게 되는 심리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말기암환자들은 대부분 처음 의사로부터 진단통보를 받고 나면 하필이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이 이 병에 걸렸는지에 대해 엄청난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고 자부한 수험생이 시험장에서 잠깐 실수로 시험을 망친 것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 다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별의별 용하다는 민간요법이나 항암치료에 기대를 걸고 병원 쇼핑을 하게 된다. 시험 끝나고 각종 루머가 난무한 수험생카페를 밤새 들락날락하는 시절을 보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미 돌이 킬 수 없는 시험장에서의 실수처럼 암환자는 병원침대에서 갈수록 지쳐만 가게 되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어느새 체념단계에 이른다고 한다. 쇠약해져가는 자신의 몸과 기력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난 그렇게 네 번의 죽음을 겪었다.
올해도 전국에 수 천명의 수험생들이 내가 겪었을 그 과정을 비슷하게 겪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
"죽어야 삽니다. 삶에서는 한번 죽음으로 끝나지만 시험에서는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버티다보면 언젠가는 살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부디, 꼭 그 때까지 잘 버티기 바랍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