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6일 공군 제1017군부대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17일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 협상의 외교채널 다각화에 나서면서 문재인 정부의 북-미 중재 전략에 상당부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달 내에 러시아의 극동 전략 요충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NHK 등 주요 외신은 25일쯤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제 4차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되더라도 후순위로 밀려 시기가 한참 늦춰질 수 밖에 없을 전망이다.
북-러 정상회담 소식은 북미간 대화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로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어 다소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문 대통령이 제 4차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중에, 그것도 중앙아시아 순방을 떠난 시점에 외신을 통해 소식이 흘러들어왔다는 점에서 북한이 한국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비핵화와 국제 제재 문제를 자체적으로 풀어나가겠다는 의중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장소나 형식 구애없이 만나자"고 까지 말하며 4차 남북 정상회담에 적극적이지만 최근 북한 분위기를 보면 회담을 수용할지 여부도 확실치 않다.
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시정연설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며 그간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미국 측에 설득해온 문 대통령을 힐난하기도 했다.
급기야 16일 평양 공군부대 방문에 이어 17일 국방과학원의 신형 전술유도무기 사격 시험을 시찰하고 "이 무기체계의 개발 완성은 큰 의미를 가지는 사변"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의 무력 과시는 미사일 실험, 핵 실험 등 북한 정권의 선대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정치적 신호다. 남북 정상회담 제안 직후 나온 행보에서 김 위원장이 북한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남북 정상회담은 없다'는 경고로 풀이된다.
북한이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문재인 정부 길들이기에 나선 정황도 포착된다.
지난 13일 '국무위원장 재추대 경축 중앙군중대회'에서 북한은 김 위원장을 '전체 조선인민의 최고 대표자'로 호칭했다.
하루 전인 12일 김정은 2기 시정연설에서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오지랖이 넓다'고 깎아내린 것도 모자라 김 위원장의 하수인 격 뉘앙스를 풍기는 부적절한 칭호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루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빈 대학 교수는 "해당 지칭은 한국과 한국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도전한 '정치적 폭탄'"이라며 "하노이 회담 뒤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감을 갖게 돼 중재자로서 문 대통령의 도움을 필요로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청와대는 이달 2일부터 정상외교 선물 특별전 '대한민국에 드립니다'를 열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받은 선물 70점이 전시된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남북정상 자수 초상'이 전시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부는 북한이 문제의 두 차례 자극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론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의 무력 과시 도발이 있은 지 하루 뒤인 18일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김 위원장이 핵·경제 병진 노선을 버리고, 경제 건설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핵 폐기에 대한 언급은 없이 "남·북·미가 협력하면 경제를 고리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평화에 기반해 다시 경제 협력을 증진시키는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 정부가 지난 2차 북미회담을 앞두고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안이 나오면 소요되는 비용 상당 부분을 조건없이 지원하겠다고까지 했지만 북한의 능멸적 언사와 남-북-미 협상 '판 깨기'로 돌아온 셈이다.
문 대통령은 대화를 통한 북한 비핵화-국제사회 편입을 일관되게 추진해왔으며,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믿어왔다. 하지만 정작 북한과 미국 모두 비핵화 협상에 있어서 장기전으로 돌입한 모양새다.
북한이 한국을 패싱(무시)한 듯한 채널 외교 다각화 행보를 시작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 15일 미네소타주 번스빌에서 실시한 연설에서 비핵화 협상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유지하면서도 "빨리 갈 필요는 없다"며 속도조절을 시사한 점 등 북미 대화는 장기화될 전망이 크다.
일각에서는 일당독재국가인 북한은 정권이 바뀔 일이 없어 비핵화 카드를 빠르게 소진할 이유가 없고,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라 국내 정치권의 주목도가 높은 대북 협상 이슈를 적어도 내년 대선 전후까지는 끌고가려고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도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을 환영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의 이번 대러 외교 강화는 단순히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높이는 차원으로 해석하기 어렵다"며 "미국은 경제제재 해제와 지원을 비핵화의 반대급부로 누누이 설명해왔기 때문에 결국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비핵화를 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새로운 협상 전략에서 패싱(제외)되는 것을 누구보다 부담스러운 문재인 정부로서는 북한의 전략 수정이라는 어려운 숙제를 받아들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