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ity without strategy is called 'art', Creativity with strategy is called 'advertising'(전략이 없는 창의는 예술이라 부르고, 전략이 있는 창의는 홍보라고 부른다)"– Jef I. Richards
과거 전문직은 홍보나 광고를 기피했다. 직업윤리 문제도 있었지만 일종의 선민의식과 선비의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광고라는 것은 지식을 파는 전문직이 할 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광고라는 것은 그 본질상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일정 수준의 자기자랑(또는 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생각해 보시라. 자기 직업을 비즈니스가 아니고 선비직(職)의 일종으로 생각하던 한국의 전문직들이 이런 광고를 생각했겠는가?
197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에서는 현재와 같은 조세자문(tax consulting)시장이 제대로 생성 발달하지 못 했다. 기업은 모든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세청 인맥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경리직원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국세청에 줄(?)을 대려고 노력하였다. 전문가를 찾기도 하였지만, 그에게서 진정한 조세자문을 받으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정기적으로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하면서 귀동냥에 준하는 상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전문직 서비스 자체를, 아니 그 가치를 잘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변호사와 회계사의 조세자문 역할이 별로 활발하지 못했다.
한편 정부의 강력한 외자도입 정책으로 말미암아, 1980경부터 한국에는 외국기업이 물밀듯이 몰려 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외국계 기업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조세자문시장(tax consulting market)이 급격히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들이 찾는 상담자는 로펌이 아닌 회계법인이었다. 외국계기업들은 전통적으로 조세문제가 생기면 바로 회계법인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조세자문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를 찾아가겠는가? 답은 뻔했다. 자기들의 본사와 제휴가 되어있는 한국 회계법인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외국본사는 대부분 PWC, Deloitte, KPMG, E&Y등 대형 국제회계법인들과 자문계약을 맺고 있었다. 그러니 외국계기업들은 이들과 member firm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의 회계법인들(현재의 한국 4대회계법인, 즉 PWC삼일, Deloitte안진, KPMG삼정, E&Y한영)을 찾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 4대 회계법인들의 조세자문업무가 폭증하고, 그들 조세그룹의 조직과 인력도 크게 팽창하였다.
세계적인 잡지들이 발표하는 각 나라별 조세그룹의 상의 순위는 모조리 회계법인이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회계법인들은 이들 랭킹자료를 마케팅자료로 적극 활용하여, 국내기업들에게도 맹렬하게 침투전략을 펼쳤다. 그 결과 조세자문에 대하여도 드디어 눈을 뜨기 시작한 국내기업들도 회계법인들을 적극 이용하게 되었다. 한국의 조세자문시장은 외국계법인들과 회계법인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당시 한국로펌의 사정은 좀 달랐다. 로펌 대부분은 조세자문분야 자체를 자기들의 주요 업무영역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로펌이나 변호사의 경우 당시에는 일감이 충분해서 순수 법률문제만 가지고도 일정 보수가 보장되었다. 즉, 조세자문까지 넘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변호사들이 내심으로 조세업무를 저급(低級)한 일로 치부한다거나, 아니면 회계 숫자와 관련되어 골치가 아프고 리스크(risk)가 높은 분야로 생각한 것도 또 하나의 숨겨진 이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조세자문시장은 회계법인과 세무사들의 독과점시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배경 하에서 이제 주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렇게 회계법인이 독주하던 시기에 한 두 개의 서구형 한국로펌이 서서히 이 조세자문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향후 로펌도 이 조세분야를 선점하지 않고서는 미래에 글로벌로펌으로서의 위상을 지켜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앞을 내다보는 대형 로펌들이 조세팀을 창설하기로 하고 시중에서 그 조세팀을 이끌어 갈 리더를 찾고 있었다.
나회계사는 어느 회계법인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회사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회계사였다. 그가 정로펌의 러브콜(love call)을 받아 정로펌으로 이직하여 조세그룹을 창설하는 작업을 맡았다.
나회계사로서는 아주 무모한 결정이었을 수도 있었다. 당시로선 조세자문에 관해 조직도 없고 경험도 없는 로펌에 투신하여 조세그룹을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매우 위험한 도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투신의 결과는 예상 외로 너무나 좋았다. 나회계사가 대박을 낸 셈이었다.
나회계사가 한국 최초로 정로펌에 조세그룹의 깃발을 들어 올리자, 그 동안 나회계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던 외국기업들이 다투어 정로펌을 찾아왔다. 여기에는 나회계사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로펌이 쌓아놓은 명성도 큰 몫을 하였다.
정로펌이 외국계회사들에게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나회계사의 명성과 정로펌의 기존 명성이 결합, 상호 상승작용을 하여 조세업무가 폭증하고 조세그룹 조직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외국계 고객들은 나회계사의 로펌행을 크게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종전에는 법률문제로는 로펌에 가야 했고, 조세문제로는 회계법인에 방문을 해야 해서 물리적으로 불편이 많았는데, 이제 한 로펌에서 모든 문제를 원스톱 서비스(one stop service)로 해결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정로펌의 조세그룹의 업무는 날로 늘어나고 조직은 비대해져서, 얼마 후 회계법인들을 크게 밀어내고 한국의 최강자(最强者)가 되었다.
한편 기업이 성숙하고 그 거래도 복잡해지고 글로벌화 함에 따라, 국내기업들도 조세자문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국내기업의 조세문제에 대한 consulting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깨달은 로펌들도 조세자문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때는 늦어서 로펌들의 시장침투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회계사의 불만도 컸다. 나회계사의 조세그룹이 회계법인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커졌는데도, 국내기업들은 회계법인에만 관심이 있는 듯, 도대체 정로펌의 실력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로펌이 무슨 조세자문업무까지 하겠느냐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회계사는 답답하였다. 국내의 매체들이라도 프로법인들의 순위를 뉴스거리로라도 만들어 발표해 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신문이나 잡지도 없었다. 이에 나회계사는 자신의 조세그룹을 공식적으로 (외국계기업뿐 아니라) 국내기업에도 정확히 널리 알릴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나회계사의 머리에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과거 회계법인에 있을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잡지를 포섭해 성공을 해본 기억이다. 매년 국가별 로펌과 회계법인의 조세자문부분 랭킹을 발표하던 잡지였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나중에 나회계사의 로펌 조세그룹이 1등이 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당연히 미국의 대형회계법인, 즉 Big Four(PWC, Deloitte, KPMG, E&Y)와 제휴하고 있는 한국회계법인들이 상위 랭킹을 휩쓸고 있었다. 이전에 나회계사가 속했던 회계법인도 그 잡지에서 1등에 오르곤 했다.
답답해하던 나회계사는 전에 알고 지내던 유명 외국잡지의 편집장(Chief Editor)에게 편지를 보냈다. 바로 답이 왔는데 때마침 자기도 한국에 들를 기회를 찾고 있다고 했다.
한 달 후 나회계사는 한국의 유명호텔에서 그를 만나 고급스런 만찬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그리고 정로펌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였다. 자기의 조세자문그룹이 규모에서나, 수입(매출)액에서나, 글로벌 고객의 수에서나, 모든 면에서 회계법인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각종 증거도 충분히 제시했다. 그의 개인적 관광 편의도 세심하게 챙겨 주었다.
출국한 그에게서 며칠 후 메시지가 왔다. 두 가지 요청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회사의 광고지면을 채울 고객을 찾고 있었는데 아직 찾지 못 했다는 것. 따라서 이 지면을 정로펌이 광고를 맡아 실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로펌 명의로 한국특집 조세관련 기사(article)를 크게 게재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회계사는 이를 즉각 수락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나회계사가 그 달의 잡지를 폈다. 나라별 조세자문 프로법인의 순위가 나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놀랍게도 나회계사의 조세그룹이 한국의 모든 회계법인들을 제치고 1등으로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근거를 자세히 달아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로펌이 회계법인들을 크게 누른 것이었다. 그런데 나회계사에게는 이게 문제의 끝이 아니었다.
국내 기업이나 언론들이 주로 외국에서 읽히는 이 외국잡지를 들여다 볼 리가 없지 않은가? 다음 문제는 국내의 기업들에게 이 발표내용을 어떻게 널리 알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정로펌은 주한 외국계기업들과 한국기업들에게 뉴스레터(news letter)를 보내고 있었다. 나회계사는 이 뉴스레터에 정로펌의 1등 소식을 올리고, 그 잡지의 기사 내용을 그대로 복사 첨부해서 배포하였다. 이렇게 하자 일순간에 정로펌의 조세그룹의 위상이 국내기업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로부터 국내기업들도 줄을 이어 정로펌을 찾기 시작하였다.
결국 나회계사는 외국잡지를 선제 공략하는 방식으로 홍보전을 성공한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정로펌은 조세자문에서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다. 나회계사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이 먹힌 것이다.
"먼나라와 친교를 맺어 이웃나라를 친다."
"Creativity and innovation are about finding unexpected solutions to obvious problems, or finding obvious solutions to unexpected problems(창의와 혁신은 너무 뻔한 문제에 예기치 못한 답을 내거나, 예기치 못한 문제에 너무 뻔한 답을 내는 것이다)"- Rei Inamo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