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사태가 내전(內戰)양상을 띠며 장기화 조짐을 보임에 따라 국제사회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급등하는 국제유가가 당장의 걱정거리다. 민간인 살상을 막기위해 군사개입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지만 국가 간 이해관계가 엇갈려 이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시아파와 수니파 간 충돌로 불안해지고 있는 바레인상황도 예사롭지가 않다. 뭐니 해도 세계 제1의 석유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가 거대한 민중봉기의 들불을 피해갈 수 있을지가 최대의 주목거리다. 만약 사우디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나 정권이 붕괴하고 석유공급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제3차 오일쇼크는 피하기 어렵다. 이 경우 세계경제는 회복은 고사하고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혁명 불길이 중동으로 번지면서 이집트의 무바라크정권은 한 때 '중동의 베를린장벽'으로 주목받았다. 베를린장벽의 붕괴가 동유럽의 공산체제를 무너뜨렸듯이 무바라크정권이 붕괴하면 중동의 여타 비민주적 집권체제도 차례로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무바라크정권은 예상보다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민주화혁명의 들불은 그 기세가 예상보다 거세지는 않다. 중동은 동유럽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비아는 튀니지나 이집트와는 다르다. 무아마르 카다피가 권좌에서 쫓겨난다 해도 순조롭게 권력을 넘겨받을 수 있는 정당이나 야당세력 시민조직 등이 전무하다. 카다피가 그의 친인척이나 같은 부족 출신 친위세력 중심으로 국가조직을 철저히 개인화해 놓았기 때문이다.
부족 간 반목과 대립의 역사가 오래고, 카다피 축출은 곧 그가 속한 카다파 부족의 몰락을 의미한다. 민주화, 반정부 평화시위가 반정부 무장봉기의 내전양상으로 치닫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카다피가 죽을 각오로 버티며 강공을 무릅쓰자 반정부세력은 국제사회에 SOS를 연발하고있다. 미국과 영국이 '비행금지구역'(No Fly Zone) 설정 등 직접군사개입을 저울질하고 있으나 실현성은 희박하다.
카다피는 지상전력에 주로 의존하고 있어 비행금지효과는 제한적이다. 비행금지구역을 강제설정하려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가 있어야 하는 데 러시아와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무기판매로 리비아와 이해관계가 깊은 프랑스의 향배도 변수다.
유엔의 뒷받침 없이 미국과 영국이 군사개입에 나서 카다피를 제거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이라크 전철을 밟을 우려가 다분하다. 외세개입에 의한 카다피 축출은 부족간 내전을 격화시키고 전체 아랍인들을 자극시켜 반미세력에 빌미를 줄 위험성이 크다.
가장 바람직한 방안은 리비아인들이 자력으로 카다피를 몰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설사 카다피가 축출된다 해도 오랜 독재에 시달린 사회가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의 길로 내달리기는 쉽지않다.
아랍 일대에서 벌어지는 민중봉기가 단기간 또는 순조롭게 민주주의로 이행하리라는 기대는 너무 성급하다. 20년 전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자유와 법치의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혼란과 고통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서방의 주요매체들은 세계경제가 단기간 고통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친개'(mad dog)를 몰아내야한다는 식의 격한 주장을 마다않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제유가 급등과 부족 및 종족 간 유혈분쟁, 통제 불능의 난민유입사태 등으로 인도주의에 따른 경제적 대가는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가 없다.
중동에서 서구식 민주주의 확산이 절대적 가치냐는 현실주의적 의문도 한편에서 제기된다. 중동에는 사담 후세인이나 카다피 같은 나쁜 독재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만의 술탄 쿠아부스 빈 사이드, 요르단의 압둘라국왕 같은 '선(善)한 독재자'도 존재한다. 아프리카수준의 작은 섬나라를 일등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같은 '중동의 리콴유'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얘기다.
'아랍인들은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아랍인들은 독재에 길 들여져 있다'는 종래의 통념은 이번 중동의 민주봉기로 여지없이 깨어졌다. 반정부 시위의 핵심은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일자리이고 이 지역 국가 모든 지도자들이 충격을 받고 국민들의 시대적 욕구를 적극 수용하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리비아를 비롯한 중동지역은 한국에게 전략지역이다. 해외건설 수주의 65%가 중동지역에 몰려있다. 한국정부가 글로벌외교를 내세우면서도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중동의 민주화사태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바깥의 비판도 없지는 않다. 한국인들이 거리투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도 중동의 민주화시위사태와는 애써 무관한 듯 이중적 태도로 바깥에 비치는 것은 실로 부담스럽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중동을 거쳐 중국으로, 그리고 북한사회로 번져나가기를 기대하는 민주적 열망은 시대의 흐름으로 누구도 거역 할 수 없다. 그러나 국제정치는 현실이고 이에 따른 국익의 판단은 냉엄해야 한다.
고가의 장비를 둔 채 몸만 빠져나온 리비아 건설현장도 당장 문제지만, 주력시장인 아랍에미리트(UAE)와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3국의 향방이 더 큰 걱정거리다. 이들 3국의 정치상황은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고 사태의 확산만 없다면 고유가를 바탕으로 한 민생증진사업과 공사발주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도 많다.
중동지역은 더 이상 미국과 영국의 '놀이마당'이 아니다. 러시아와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갈수록 얽히고 있고 한국도 중요한 이해당사자다.
유럽은 미국과는 달리 리비아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 지역에 외세가 개입해 정치적 혼란을 불러오고 그 결과로 경제파탄이 빚어질 경우 알카에다와 테러조직들이 활개 치는 여건을 조성하게 된다.
'독재자 때리기'와 독재자 제거를 위한 외부의 군사개입은 냉철히 구분해야한다. 리비아사태는 평화적 시위와 강경진압의 차원을 넘어 반정부군과 정부군의 내전으로 변질되고 있다.
외부의 군사개입은 단기적으로 무고한 시민의 생명을 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잃을 위험이 더 크다.
서방세계와 국제사회가 당장의 개입유혹에 빠져 중동의 석유와 정치적 안보를 함께 잃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이에 놀아나지 않도록 우리정부 또한 중심을 단단히 잡아야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