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들의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된 퇴직연금 시장에서 대기업들이 퇴직연금 가입을 미끼로 금융권에 과도한 혜택을 요구하는 이른바 `역꺾기'가 성행하고 있다.
4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퇴직연금 가입을 앞세워 금융회사의 과당 경쟁을 유발시키고 있다.
기업들이 퇴직연금 금리를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본이고, 사적으로 기업 임직원들의 대출금리를 낮춰달라고 하거나 자사의 상품 또는 시설을 이용해 달라는 압박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게 금융권의 주장이다.
일부 전자업체는 퇴직연금 가입 조건으로 금융회사에 자사 제품을 강매하기도 했다. 대부분 은행이 직원들에게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을 지급하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퇴직연금 규모 1천억원 수준인 B사는 금융회사들이 향후 전산 개발 시 자사와 단독계약을 해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은 금융기관들을 최종 사업자에서 탈락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C사는 노조 전임자 수 감소에 따라 기존 전임자 수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금융회사에 청구하기도 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카드업 진출을 꾀하는 D사가 해당카드사 지분을 보유한 은행들로부터 지분을 저가에 매입하는 대가로 퇴직연금을 할당해주기로 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은행보다 보험회사에 퇴직연금 가입을 조건으로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일부 기업들은 금융회사가 리베이트를 제공한다며 은근히 이를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혼탁해진 퇴직연금 시장을 정상화하려면 감독당국이 나서 불법·부당 사례가 없는지 검사해 과당 경쟁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대기업의 역꺾기 행태에 대해선 당국 또한 감지하고 있다"며 "이와 별도로 금융회사 간 과당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 시장 감시도 강화할 계획이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대기업이 금융계열사로 퇴직연금을 몰아주는 사례도 적지 않다.
현대자동차가 계열사인 HMC투자증권 한곳에 퇴직연금 1조원을 몰아준 데 이어 현대중공업도 작년 말 계열사인 하이투자증권과 퇴직연금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그룹의 경우 2009년부터 삼성생명에 퇴직연금 계약을 집중한 것으로 금융권은 파악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금융 계열사에 실적을 몰아주면 금융회사들은 상품으로 승부할 수도 없게 되고, 실적 왜곡 현상 또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또 대기업 직원들은 상품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빼앗기게 된다"고 덧붙였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은 2008년 5조원에서 2009년 10조원, 지난해 29조원을 달성한데 이어 올해 50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