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 유권자에게 한 약속 즉, 공약(公約)은 지켜지지 않는 공약(空約)으로 조롱받은 지 오래다.
미국 정가에서는 '공중에 뜬 파이'(pie in the sky), 우리 식으로 '그림의 떡' 같은 실현성 없는 약속을 빗대는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공약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국민을 상대로 내놓은 대선 공약들이 줄줄이 파기되고 있다. 표를 얻는 데만 다급해 세밀한 검토 없이 남발했다가 이행이 곤란해지자 '유감' 또는 '송구스럽다'는 말로 사과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당선되고 보자'는 마음에서 철석같이 다짐했다가 당선되고 난 후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운운하며 물러서면 그만인가.
'선거 때 공약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 '당선을 위해 무리한 공약을 내놓은 후보도 잘못이지만, 그런 공약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대통령은 더 바람직하지 않다'며 '고뇌에 찬 결단'을 감싸는 부류도 적지 않으니 어찌된 세상인가.
공약남발-파기-사과의 악순환에 따른 피해는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는다. 세종시 수정 문제로 반년 이상 온 나라가 들썩였고, 동남권 신공항 문제로 영남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감정싸움을 벌였다.
사회적 갈등 비용은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게다가 집권자의 리더십 훼손, 국정운영에 대한 불신 증폭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적 비용도 엄청나다.
이명박(MB)대통령의 공약파기는 세종시 문제를 포함해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2월 신년좌담회에서는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과학벨트) 공약과 관련해 "선거유세 때 충청도에 가서 이야기했으니까 표 얻으려고 내가 관심이 많았겠죠"라며 공약을 뒤집는 듯한 발언을 했다.
신공항에 이어 과학벨트 입지선정, 5월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전문제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정치 및 지역논리를 배제하고 '정면돌파' 한다지만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반복된다면 신뢰의 위기로 내몰릴 수 있다.
집권 4년차로 접어들어 차기 논의가 시작되는 마당에 국민은 물론 정치권으로부터 신뢰마저 잃어버린다면 국정추진동력은 고갈되고 집권말기의 연착륙도 장담하기 어렵다. 잇따르는 선거에도 연쇄 파장이 불가피하다. 스스로 내세운 '공약의 벽'을 어떻게 뛰어넘을 지가 주목된다.
문제의 동남권신공항은 MB가 집권중반까지 유지해오던 대선공약이었다. 대선후보 시절 "대통령이 되면 동남권신공항을 만들어 세계로 통하는 하늘 길을 열어주겠다"고 약속했고, 대통령이 된 뒤인 2008년 5월에는 "하늘 길과 물길을 열어 항공 물류와 낙동강 해상 물류가 동시에 개발되면, 수도권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경쟁력을 갖게된다"며 공약 추진의지를 재확인했다. 불과 한 달여 전인 2월25일 정종환국토해양부장관은 국회에서 "동남권신공항은 반드시 건설하겠다"며 "3월말까지 입지평가를 끝내겠다"고 다짐했었다.
동남권신공항 공약파기는 대통령의 말처럼 "다음 대통령, 다음 세대의 짐"까지 고려하는 '결단'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공약을 사전에 엄밀히 검증하지 못한 '원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약속이 불발될 경우 왜, 어떻게 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신뢰할 수 있는 파기과정을 보여 주며 차근차근 설득과 국민적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입지선정에 가장 중요한 결정권을 가진 '채점담당' 평가단이 발표 하루 전에서야 현장 두 곳을 확인하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와 다음날 아침 채점을 하고, 바로 국토부가 평가를 완료하고 국무총리가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해 공식 발표하는 '번개불에 콩 구워 먹는 듯한' 결정과정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신뢰를 보냈을까.
신공항 공약의 당사자는 MB다. 따라서 총리나 내각보다 MB가 직접 나서 국민에게 입장을 밝히고, 총리와 내각은 국민과 정치권의 여망을 수용해 후속 조치를 뒷받침하는 순서로 이어졌어야 했다.
대통령이 마지못해 나서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면서 사과는 사과대로 하고 갈등은 갈등대로 남기는 결과가 됐다.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 박근혜 전 대표가 '미래 국익' 관점에서 향후 신공항을 추진하겠다고 말해 갈등은 더욱 증폭되는 양상이다.
밀양과 가덕도 두 곳 모두를 신공항 후보에서 탈락시킨 근거는 '경제성 부족'이었다.
그러나 이번 동남권 신공항보다 경제성이 더 낮게 평가 받은 호남고속철, 새만금 신항, 포항-삼척, 상주-영덕 고속도로 등 상당수가 정상 추진되고 있다.
B/C(비용에 대한 편익)비율을 국책사업 결정의 최우선 잣대로 삼으면 강원이나 호남, 경북 북부, 경남 서부 등 인구(수요)가 적은 곳에서는 편익(B)을 높이기 어려워 국책사업을 유치할 수가 없다.
어느 사업에서는 경제성 잣대를 중시하고, 어떤 다른 사업 평가에선 지역균형 개발 등 비경제적 가치를 중시하는 등 결정기준이 오락가락 하면, 사업을 유치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정치적 입김에서 밀렸다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동남권 주민과 기업이 인천공항을 이용하느라 추가로 지불하는 비용만 연간 3000억 원에 이르는 현실에서 단순한 경제논리보다 균형발전 측면을 강조하는 영남권의 주장을 지역민 이기주의로만 폄하하기는 어렵다. 신공항으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는 경제성평가에서 배제되고 공항자체의 경제성만 계산했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중요한 것은 사과의 진정성이다. 이번 결정에 따른 지역의 소외감을 지역발전과 교통편의 증진 등 성의 있는 행동으로 얼마나 씻어 줄 수 있느냐는 문제다.
동남권 신공항과 과학벨트, LH공사 이전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에는 모두 수도권에 대한 지방의 피해의식이 깔려있다. 수도권과의 격차 확대로 지방 주민들의 소외감이 갈수록 커가는 상황에서 선거 때를 이용해 지역 유권자들이 중앙정부 힘을 빌려 지역 발전을 도모하려는 유혹도 커지기 마련이다.
국가가 개발사업을 입안하고 주도하면 특정지역에 혜택을 주는 것으로 비쳐지고 모든 지자체가 사업유치를 위해 덤벼들 수밖에 없다. 대형 지역개발사업들이 선거를 거치면서 정치인들에 의해 국책사업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라도 사업추진은 지방정부가 주도하고 정부는 지원하는 형태로 바꾸어 나가야한다.
과학벨트는 충청권유치 공약이 뒤집어지면서 각 지역이 유치경쟁에 뛰어들고, 거점시설 일부를 '보상용'으로 영남권에 줄 가능성까지 점쳐지면서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LH가 통합되기 전 주택공사는 경남 진주 혁신도시로, 토지공사는 전북 전주혁신도시로 각각 이전이 확정됐었다. 하지만 MB의 '공기업 선진화'조치로 2009년 둘이 통합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영호남 간 갈등까지 가세하면서 이 조정 역시 난항을 겪고 있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술이 다름 아닌 정치다.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함께 정치를 복원하고, 공약-파기-사과의 악순환을 막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국익을 위하고, 다음 세대와 다음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