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 공판에는 특별한(?) 인사가 피고인으로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은 지난 98년 소위‘북풍사건’의 핵심 배후인물이라는 혐의를 받고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지난 2000년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된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었다.
권 前안기부장은 지난 97년 안기부장 재직시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던 김태호 전 의원으로부터 대선 자금 모금을 부탁 받고 K기업 등 공기업으로부터 3억원을 모금해 신한국당 측에 건넨 혐의를 받고 피고인석에 다시 섰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지난 2000년 불구속 기소처분을 받은 바 있으나 핵심인물인 이석희씨가 귀국하고 1심 선고에 머물러 있던 공판이 재개되자 재판부가 사건심리를 병합해 다시 재판정에 서게 된 것.
재판부은 이 날 공판에서 그가 연루된 사건에 대한 결심선고를 진행, 검찰 측은 그에게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을 구형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했고 최후 변론에 나선 그의 변호인이 뱉은 한마디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의 변호인은“피고인이 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수 차례 기소되는 등 심신이 지친 상태”라고 전제하며“비록 불법 자금을 모금했으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김 전 의원의 부탁을 피고인이 거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부하직원에게‘안기부장으로서 체면을 세워야지 않겠냐’라고 무심코 말한 것이 발단이 돼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며 자금 모금이 불가항력이었음을 납득시키려는 인상이 역력했다.
권 前안기부장도“오랫동안 이 문제로 재판을 받아와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다”며“고위 공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안기부처럼 상명하복이 강한 집단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권 前안기부장이 세풍사건에 한 발을 걸치게 된 것은‘체면 좀 세워달라’는 상관의 추상같은(?) 하소연에 부하직원들이‘알아서’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 비록 3억원의 돈으로 안기부장이라는 직함에 걸 맞는‘체면’은 세웠겠지만, 그 체면의 댓가는 좋지 않았다.
그는“상명하복이 강한 집단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상명하복이 강한 집단일수록 언사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고위 공직자로서 갖춰야할 바른 미덕임을 생각해 볼 때 그의 말로가 곱지 않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