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김용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하 김 위원장)이 지명 닷새만인 지난 29일 저녁, 자진 사퇴했다. 새 정부 초대 총리 지명자가 스스로 물러난 것은 김 위원장이 헌정사상 처음이다.
김 위원장이 자진 사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한 것은, 그를 둘러싸고 제기된 각종 의혹들 때문이었다. 국민들이 '치'를 떠는 사안인 부동산 투기 의혹이 무더기로 쏟아졌고 가장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자녀의 병역면제 의혹이 덧붙여졌다.
진실 여부를 떠나, 언론의 강도 높은 검증에 버텨낼 '배짱'을 김 위원장은 가지지 못했다. 수십 년의 법관 생활을 통해 쌓아올린 자신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김 위원장은 자신은 물론 가족, 국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채 쓸쓸한 퇴장을 앞두게 됐다.
첫 국무총리 지명자 낙마(落馬)…'비극' 왜?
'비극의 씨앗'은 지난 24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김 위원장을 총리 후보로 지명한 직후부터 잉태했다. 박 당선인이 그를 총리 후보로 지명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총리 후보와 관련해 수많은 하마평(下馬評)을 쏟아냈던 언론들은 소위 '물'을 먹었다.
어쩌면 언론들은 작정하고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 김용준'에게 달려들었을 수도 있다.
지나치게 보안을 강조,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은 박 당선인의 인사스타일, "모두 오보(誤報)를 만들겠다"는 둥 언론인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인수위 대변인의 행태에 단단히 화가 나있었을 수도 있다.
그 화살이 박 당선인의 첫 작품, '김용준'에게 무더기로 날아든 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빌미를 제공한 것은 김 위원장 자신이다.
김 위원장이 총리 후보로 지명된 후 언론에서 의혹들이 제기되자, 관가 주변에서는 '낙마설'이 떠돌기 시작했다. 모기소리 정도로 시작된 '낙마설'은 언론에서 제기하는 의혹의 강도가 높아지자, 확성기 소리만큼 크게 발전했다.
부동산 투기 의혹과 자녀 병역면제 의혹은 국민들의 '감정선'을 제대로 건드렸다.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이 부동산을 사들일 당시(1970년대∼1980년대), 한 자리 한다는 고관대작들은 '관행'처럼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자녀 병역면제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했고 사회의 투명성이 매우 낙후되어 있던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는 모두 '용인'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계는 1970년도, 1980년도 아닌 2013년을 가르키고 있다. 그 동안 세상은 변했다. 국민들도 더 이상 '말없는 대중'이 아니다. 각자 명확한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평가하고 권력층의 부도덕한 행태를 눈감고 봐주지 않는다.
김 위원장이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들에 대해 단 한 마디의 해명도 내놓지 않은 것도 그 시대의 관행을 따라 살아 온 그가 이런 의혹들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법과 원칙, 소신이 몸에 밴 그의 사고로는 과거의 일을 현재의 잣대로 재단한 언론의 무차별 의혹제기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는 김 위원장이 자진 사퇴를 하면서 언론의 보도 행태가 탐탁지 않다는 투의 말을 남긴 것만 봐도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는 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그는 '적절한 시기에 해명하겠다'는 모호한 말만 남긴 채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의혹들의 진실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선택을 했다.
김용준, "총리직 맡아달라" 박근혜 제안 거절했다면...
역사에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은 가정을 전제로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생각해 보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역사에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만약 그 때 이랬더라면...', 의미 없는 일이지만 생각해 볼 가치가 없는 일 또한 아니다.
첫 총리 후보 지명자 낙마와 관련해 설정해 볼 수 있는 최선의 가정은 '만약 박 당선인이 김 위원장에 대한 인사검증을 철저히 했다면?' 이다.
아마 현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민망한 상황들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사검증을 떠나 김 위원장이 박 당선인의 총리직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가정을 현실로 만들 수 있겠지만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재상 황희(黃喜, 1363∼1452)도 실제로는 부정부패를 일삼는 인물이었다(세종실록에는 그가 대사헌에 임명될 당시 금덩어리를 뇌물로 받았던 사실이 발각 '황금 대사헌'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갖게 됐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다만 황희가 위인전에 '청백리 재상'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기에, 그가 연루된 비리는 백성들에게 가려졌고 집에 멍석을 깔고 앉아 보리밥을 먹던 그의 '청렴성'만이 백성들에게 알려졌다.
타의 모범이 되는 법관 생활로 '존경받는 원로 법조인'으로 칭송 받았던 김 위원장도 황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언론에서 제기한 그의 과거행적은 그가 법조인으로 살면서 쌓아온 이미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국민들도 알 건 다 아는 시대다. 무수한 비리공직자의 명멸을 접하며 고위공직자를 바라보는 '눈높이'가 높아진 국민들이 '지난 일이니 눈감아 주자', 식의 넓은 포용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김용준의 낙마로 많은 것을 잃었다. 부정한 일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박근혜 당선인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었다. 김 위원장은 수십 년 쌓아온 자신의 명예와 덕망을 단 5일만에 잃어버렸다.
이번 사태로 박 당선인이나 김 위원장은 상당한 시간 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국민들이다. 존경을 받을 만한 국가원로 한 사람을 잃었고 새롭게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 5년, 새로운 대한민국이 열릴 것을 바랬던 '희망'의 상당 부분도 잃었다.
지금 이 순간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것은 박 당선인도 김 위원장도 아닐 것이다. 바로 대한민국 국민들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