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세연구원이 지난 5일 서울시 명동 은행회관에서 개최한 '제47회 납세자의 날 기념 정책토론회' 이후, 조세전문가들 사이에서 부가가치세(이하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 도입 방안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 김재진 조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증세 없는 세수확보 방안으로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 도입 방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부가세율을 직접 인상하는 대신 현재 매출자가 납부하도록 세법에서 정하고 있는 부가세를 매입자가 납부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김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할 경우 금, 동과 같은 업종에서 폭탄업체 등을 악용한 부가세 탈세행위를 차단할 수 있고, 체납율이 높은 부가세 징수실적을 상당히 높일 수 있다는 견해다. 세율 인상 등 직접적인 증세 없이도 복지재원 확보가 가능한 셈이다.
당시 조세연구원장으로 재직하던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에 대해 "세정상 취약점을 보완해 부가세 탈루를 방지하는 제도"라며 "현행 조세체제에서의 누수를 막아 납세자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평가한 바 있어 새 정부가 제도 도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세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하면 상당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조세연구원 측에서는 단계적인 제도 도입을 추진하면 연간 최대 7조1000억원 이상의 세수증대 효과가 있다고 전망했지만, 전문가들은 세수확보 효과도 적고 국민들의 조세저항만 불러올 것이라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또한 신용카드 거래에 대해 우선적으로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 도입을 추진할 경우 그동안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줄기차게 추진했던 신용카드 거래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세금징수가 어려운 현금거래만 활성화시킬 우려가 크다는 분석도 많다.
□ 생소한 매입자 납부제도…"부가세 징수제도 근본 흔든다" = 김재진 조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5일 증세없는 세수확보 방안의 하나로 부가가치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내놓았다.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란 쉽게 말해 현재 기업·사업자 등이 소비자로부터 물건 값과 함께 받아 국세청에 납부해오던 부가세를 앞으로는 일반 소비자 등 매입자가 직접 내는 제도다.
제도가 시행될 경우 현재 직장인들의 월급에서 미리 소득세가 떼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과 자영업자들의 매출액에서 부가세가 바로 떼여, 기업과 자영업자들도 '부가세 유리지갑 신세'가 된다.
김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부가세 제도는 납세의무자와 실제로 세금을 부담하는 납세자가 달라, 세금탈루 및 체납액이 많은 실정이다.
예를 들어 현행 부가세법에 따르면 소비자가 구멍가게에서 1만1000원(부가세 1000원 포함)의 물건을 구입할 경우 1000원의 부가세까지 구멍가게 주인에게 낸다. 구멍가게 주인은 소비자로부터 받은 부가세 1000원을 3∼6개월 이후 부가세 신고기간에 국세청에 납부한다.
즉 실제로 1000원의 부가세는 소비자가 구입과 동시에 부담하지만, 정작 부가세는 구멍가게 주인이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 국세청에 납부하는 구조다.
하지만 소비자로부터 부가세를 받은 구멍가게 주인이 어려운 경제상황 등을 이유로 장사가 잘 되지 않아 폐업을 하거나, 일부러 세금을 탈루할 경우에는 국세청에서 소비자가 이미 구멍가게 주인에게 낸 1000원의 부가세를 징수할 방법이 없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이 같은 부가세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 때문에 부가세 체납비율은 2011년을 기준으로 무려 11.3%에 달한다는 것. 우리나라 주요 세목인 소득세와 법인세의 체납비율이 9.0%, 2.6% 등에 불과한 점과 비교하면 체납이 상대적으로 많다.
이 같은 이유로 지난 2011년 기준 부가세 징수총액과 실제 징수금액의 차이도 11조2402억원에 달했다.
□ 연간 세수효과 '7.1조원＋α'…"신용카드 거래부터 단계적 도입" = 김 연구위원은 이 같은 부가세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현행 부가세 징수체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기에 앞서, 거래내역을 포착하기가 쉬운 신용카드 거래 등에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구멍가게에서 신용카드로 1만1000원(부가세 1000원 포함)을 내고 물건을 구입할 경우, 카드회사가 1000원의 부가세를 국세청에 납부하고 나머지 1만원만 구멍가게에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소비자가 물건 구입금액을 결제함과 동시에 10%의 부가세가 카드회사를 통해 국세청에 납부되므로 체납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로나 다름없어진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할 경우 증세 없이 연간 최대 7조1000억원 이상의 세수가 늘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부가세 먼저 떼면 국민들 조세저항↑…"나라 망한다?" = 하지만 조세전문가들은 김 연구위원이 내놓은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나타냈다. 국민들의 조세저항이 만만찮게 발생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특히 조세전문가들에 따르면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가 시행될 경우 구멍가게 주인 등 영세자영업자들의 부가세 부담이 크게 늘어나, 상당한 조세저항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신용카드 거래에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할 경우 소비자가 구멍가게에서 1만1000원(부가세 100원 포함)을 주고 물건을 카드로 구입하면, 구멍가게 주인은 카드회사로부터 1000원의 부가세를 제외한 1만원의 물건값만 돌려 받게 된다.
현행 제도상에서 1만1000원의 금액을 모두 돌려 받던 것과 비교해 한 순간에 수중에 입금되는 돈이 1000원이나 줄어드는 셈이다.
한 조세전문가는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구멍가게 주인 등이 1000원의 부가세를 납부하는 것은 예전과 다를 바 없지만, 일단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는 이익이 대폭 감소한다"며 "일반 사업자들은 물건값의 10%를 나중에 국세청에 납부할 세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조세저항'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하면 체납이 줄어들 가능성도 크지만, 무조건 징세편의를 위해 제도를 바꿔서는 안 된다"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편하게 거두려한 나라들은 모두 망했다"고 지적했다.
□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 "지하경제 '현금거래'만 활성화" = 조세전문가들은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할 경우 부가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소비자와 영세사업자들 모두 세금징수가 어려운 현금거래를 선호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우선적으로 신용카드 거래에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를 도입할 경우 소비자는 물론 영세사업자들까지 10% 부가세를 칼같이 떼이게 되므로, 국세청 등에서 거래를 파악하기 어려운 현금거래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사업자들이 부가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현금으로 결제할 경우 10% 가량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겠다는 제안을 할 수 있고, 소비자 입장에서도 같은 물건을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현금거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자칫 그동안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 및 세원확대를 위해 꾸준히 추진해온 신용카드 거래 활성화 정책에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셈이다.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부가세 매입자 납부제도의 가장 큰 단점은 현금거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신용카드 거래로 10%의 부가세를 바로 떼이게 된다면 현금거래는 증가할 수밖에 없고, 신용카드 거래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