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의 한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차명 계좌를 무엇에 비유할까 생각해봤는데 손안에 쥔 칼과 비슷한 것 같다. 손에 칼을 든 사람이 과일을 깎거나 조각을 할 수 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단지 사람을 죽일 것을 걱정해 아예 칼을 못 쓰게 할 것인가."
새 정부 들어 차명 계좌의 금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금융실명제를 도입한지 20년이 흘렀지만, 대기업과 정치인들의 불법 비자금 거래에 여전히 많은 차명 계좌가 동원되면서, 차명 거래는 마치 사회악의 한 축으로 비쳐지고 있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합의에 의한 차명 계좌, 즉 가족이나 상거래의 차명 거래도 처벌하는 법안 개정을 추진 중이다.
현행 금융실명제는 가명이 아니면 차명 거래를 사실상 허용하지만 이마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금융권에서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탈세 목적의 차명 거래는 전체의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부의 예금자들은 정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5000만원 한도를 넘으면 가족의 명의로 예탁을 한다. 이는 정부가 예금자 피해를 막기 위해 지난 저축은행 부실 사태 때 장려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의의 차명 거래를 처벌하면 엉뚱한 피해자가 생겨날 뿐 아니라 또 다른 편법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고민이다. 대기업의 차명 거래를 막으면 장기적으로는 은행의 수익성도 줄어들 것이 우려될 수 있다.
또 일반인 거래를 다 찾아낸다고 해서 세수 확보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떠한 선진적인 제도라도 '양날의 검'이 될 수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어떻게 기술적인 방법으로 탈세 목적의 거래와 일반인 거래를 구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금융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차명 거래를 처벌하는 것에 동의하지만, 선의의 거래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기술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금융 산업은 큰 도약의 길목에 서있다. 아직 선진국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대형 투자은행(IB)이 곧 출범하고 파생 상품 시장도 급속도로 성장을 이뤄냈다.
손안에서 모든 종류의 금융거래가 가능해진 상황에서 이러한 기술적 역량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금융 산업의 무능력이다.
현재 금융권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금융거래를 신청할 수 있는 비(非)대면 거래를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비대면 거래를 인정하면서 차명 계좌를 금지하는 것은 금융 산업의 발전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정부 기관인 금융정보분석원(FIU)은 국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금융거래를 추적할 수 있으나, 무고한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극히 제한된 양의 정보를 수사에 이용하고 있다.
부작용이 두려워 현행 제도를 유지하자는 것은 결국 제자리걸음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명 계좌를 근절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정말로 강하다면 이제는 상반된 두 의견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