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십니까? 고려대 경영학과 08학번 주현우(27)씨가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붙인 대자보(大字報)의 물음이 사회적 울림을 낳고 있다.
주씨는 지난 10일 대자보를 통해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직위해제,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음독자살 한 밀양 송전탑 시민 등 오늘의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의 세태에 일침을 가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소식은 SNS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대학가였다. 인천대, 서강대, 상명대, 중앙대, 용인대, 성균관대, 부산대, 제주대 등 전국 대학교 게시판에 이에 대한 응답자보가 붙었다.
인천대 대자보에는 "이름 내걸고 자보를 써보는 것도 익숙지 않지만 저희가 이제껏 침묵해온 사실이 더 부끄럽다. 고려대 학우님의 외침이 단순히 고려대로만 끝나게 된다면 그 부끄러움은 더 커질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성균관대 정외과 최종학씨(09학번)는 "그간 안녕하지 못한 세상을 보면서 안녕하고자 했던 제가 부끄러워 진다"며 "저는 오늘부터 안녕하지 않습니다"고 선언했다.
전북대학교 영어교육학과 08학번 김민우씨는 학교 정문앞에 내붙인 '전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대자보에서 "지금의 우리나라는 진보와 보수의 상호 비판을 인정하기는커녕 진보를 '빨갱이', '좌빨', '종북'이라는 위험한 색깔적인 단어로 아무렇지 않게 매도하는 나라"라며 "이러한 부끄러운 나라현실에서 우리가 진정 취업만 한다면 안녕해질까요"라고 반문했다.
고려대 대자보의 주씨는 지난 14일 한 라디오 시사 전화 인터뷰에서 "단 하나도 안녕하기 어려운, 하나만 봐도 안녕하기 어려운 사태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며 "정말 안녕한지 아닌지에 대해 우리가 한 번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나"는 것이 대자보의 근본취지라고 밝혔다.
16일에는 전북 군산의 한 여고생이 학내 게시판에 '고등학교 선배님들, 학우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내붙이는 등 대자보 신드롬은 고교생들로 이어지고 있다.
인터넷시대에 대자보는 왠지 생뚱맞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인터넷상에 익명으로 툭 던져놓고 끝내는 그저 그런 글들이 아니고, 이름과 학번을 당당히 올려놓고 불의에 침묵하거나 무관심한 젊은이들에게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는 자각의 메아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데 이번 대자보 신드롬의 특징이 있다.
주씨 대자보를 계기로 모인 학생 200여명이 '철도민영화 반대'를 외치며 고려대 안암캠퍼스에서 철도노조 집회가 열린 서울역 광장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평범한 인사말이 어찌하여 휘발성을 갖는 시대의 화두(話頭)가 됐을까.
물론 이에 대한 역풍도 만만치 않다. 주씨가 과거 진보신당에서 활동했고 현재 노동당(옛 진보신당)당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권과 연계된 운동권 학생들의 작전에 의한 선동 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보수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 회원들이 각 학교의 대자보를 훼손하고 이를 인증하는 사진을 게재하는 소동도 빚어졌다.
"찬반이 첨예한 문제를 놓고 지지하지 않으면 사회에 무관심한 것이냐"는 반박대자보가 등장하는 등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대학의 대자보가 인터넷 시대에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서는 모양새다. 찬반과 호불호를 떠나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고, 이 때문에 우리 모두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대자보 신드롬의 확산에 정치권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치가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성하는 데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새누리당은 일단 당 차원의 공식 대응은 하지 않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 집권 2년차를 앞두고 대자보 확산이 철도노조 파업 등과 맞물려 대대적인 촛불집회 등으로 번지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다.
철도노조가 파업 이유 하나로 꼽은 수서발 KTX는 "민영화가 아닌데도 민영화라는 선전선동이 일어나고 있다며 (대자보가) 잘못된 촛불로 흐르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노조는 여전히 수서발 KTX 자회사가 '민영화로 가는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지분 일부 조정, 민간매각 금지 정관 명시 등으로 민영화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는 그동안 국토부가 추진한 철도민영화 정책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민영화 추진을 위한 거짓말 시리즈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쌍방 간 뿌리 깊은 불신이 문제며 노사 모두 한발씩 물러나 민영화 논란에 대한 불신의 골부터 먼저 해소함이 순서다.
박근혜 대통령은 19일로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 지 꼭 1년을 맞는다. 하지만 대선 직전에 터진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이 아직도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고, '정치실종'의 여야 극한대립 속에 국민통합 실패, 복지공약 후퇴 논란 등의 후폭풍에 휩싸여 있다.
적극적인 대통합 정책을 통해 반대진영을 끌어안아야 했음에도 복지 확대와 인사 탕평, 경제민주화 등을 통해 사회를 하나로 묶는 데는 크게 미흡했고,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이나 서해 북방한계선 문제 등 대야(對野) 관계에서 정치력 부재를 드러냈었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을 놓고 개신교 등 종교단체의 시국선언이 계속 이어지고, "선거부정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정당한 요구를 공안탄압과 종북몰이로 짓누르는 현 집권세력의 태도는 스스로가 공범임을 말해주는 것"이라며 '대통령사퇴'주장도 그치지 않고 있다.
사상 최대의 무역흑자 속에서 부의 편중은 심화되고, 체감경기의 악화와 청년실업, 게다가 투자부진으로 나라경제가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 신세인 현실에서 국민 대다수가 행복은커녕 안녕할 수도 없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신드롬을 '좌파네티즌들의 선동'으로만 폄하함은 극히 위험하다. 장성택 처형에 따른 북한사태라는 외환(外患)에도 잘 대비해야하지만 집안의 내우(內憂)도 잘 다스려야한다. 이념이나 색깔로 편 가르는 진영논리로 국정운영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을 언제까지 외면하거나 잠재울 수는 없다.
'안녕치 못하다'는 국민들이 늘어나는 것만큼 안보에 큰 위협도 없다.
독선과 불통(不通)을 더 이상 고집하면 집권세력 또한 안녕치 못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