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통일 담론이 되살아나고 있다. 한 유력 일간지가 '통일은 미래다'는 표제 아래 '잊혀진 통일의 꿈을 되살리자'는 캠페인을 신년 기획시리즈로 연재하며 '바람몰이'하는 사정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분단이 장기간 지속되고 남북 간 대결구도가 굳어지면서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멀어지고 있다. 남북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0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반면 통일보다는 현재대로가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여론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20대(65.3%)와 30대(52.6%) 등 젊은 세대일수록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미래 통일의 주역인 20,30대 젊은 층에서 '통일무용론'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연두 '통일대박론'은 뜬금없이 들린다. 통일이 가져올 편익을 열거하면서 대통령이 통일 지향적인 대북정책을 펴겠다는데 이를 반대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2014년 한반도와 우리 주변 현실이 '통일이 곧 대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우리의 안보현실은 한마디로 '엄중'하다. 북핵문제는 여전 현재 진행형이고, 북한의 대남 도발가능성은 1〜3월초 위기설이 나돌 정도로 위협적이다.
북한 국방위원회 김정은 제1위원장의 신년사로 시작된 북한의 '평화공세'는 그 진정성을 둘러싸고 남북 간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장군 멍군'이 거듭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올해는 자주 통일 평화번영을 위한 새 길을 열어야 한다"며 남북한 모두 관계개선을 위해 적극 노력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박근혜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제의한 '민족의 명절 설을 앞둔 이산가족 상봉'은 연례적인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연계시켜 거부했다.
북한은 지난 16일 이달 30일부터 상호 비방·중상 중지와 남한의 '키 리졸브'와 '독수리' 한미 군사연습 중지, 북한의 서해 5도 대남 '자극행위' 중지, 한반도 '핵 재난'을 막기 위한 상호 조치 등을 골자로 하는 '중대제안'을 발표했다.
우리정부가 바로 다음날 북한이 사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며 북한 제안을 사실상 거부하자 북한 국방위원회는 다음날 '중대 제안'을 '실천적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겠다며 남한도 이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앞으로 보여줄 '실천적인 행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북한의 '위장평화 공세'에 속지 말라며 해외순방중인 박대통령이 "안보태세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하자 북한은 20일 다시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며 파상적 평화공세를 벌이고 있다. 제의-거부-중대제의-거부-거듭 제의의 장군멍군 속에 남북관계는 교착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통일 대박'은 분단의 '평화적 관리' 차원을 넘어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통해 통일을 조기에 달성하고 통일의 편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정책의지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실천전략은 일체 찾아보기가 어렵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가시적인 조치 없이 통일시대 기반구축이 불쑥 튀어나온 배경에는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상황의 불안정성에 따른 북한급변사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국정원장이 주장했다는 '2015년 통일론'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주장했던 '통일이 도둑같이 찾아온다'는 주장들이 그러하다.
'통일대박론' 역시 북한 급변사태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이에 대비하자는 뜻으로 읽혀진다.
물론 북한 급변사태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급변사태에 초점을 맞춰 대북정책을 추진할 경우 남북관계를 풀어내기는 어렵다. 설령 김정은 정권이 무너진다 해도 군부 등 대체 세력이 정권을 이어갈 가능성이 없지 않고, 북한체제와 국가가 소멸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의 뇌졸중 이후 북한의 붕괴가 멀지 않았다고 보고 기다리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북한은 김정일 사후 김정은에로의 권력승계를 마무리하고 장성택 숙청 등으로 김정은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도 북한이 붕괴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논리로 기다리는 전략으로 일관했지만, 북한은 붕괴되지 않았고 핵 능력만 향상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기다리는 정책에서 적극적 개입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는 전략으로 정책 방향을 수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북한의 '평화공세'는 장성택 처형 등으로 내부가 불안정하고, 중국의 계속된 견제로 도발역량이 약화된 상태에서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기위한 궁여지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양국군이 2월 말부터 시작할 올해 합동훈련에서 지난해처럼 B52, B2 전폭기와 핵잠수함 등 핵전력을 공개적으로 전개할 경우 북한이 격렬하게 반응하고, 우발적 군사적 충돌이 전면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한 정세가 조성될 수도 있다.
통일기반 조성에는 통일지지 여론만으로 안 되고 비핵화와 남북관계개선,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차분하고도 끈질긴 통일외교가 뒷받침되어야한다. 급변사태 가능성에 항상 대비해야 하지만 급변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비한 통일노력도 함께 병행해야한다.
북한이 원하는 건 그들 체제 안전이고, 핵 개발도 체제 유지와 관련이 깊다. 6자회담을 재개해 핵 개발 속도를 늦추면서 비핵화를 위한 대화협력의 장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북한 핵 능력의 고도화를 차단하고 북핵의 완전한 폐기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대목은 주목을 요한다. 완전한 폐기로 가기 전에 중간단계로 핵 능력 고도화 차단을 언급한 것은 선(先) 핵 폐기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선 핵 동결 후 핵 폐기'의 수순을 밝힌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최근 한국을 다녀간 유럽안보협력기구 람베르트 자니에르 사무총장은 박대통령의 '신뢰외교'와 관련해 "신뢰를 대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아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취하겠다는 '신뢰조성 조치'들을 지켜보고 그에 따라 한미합동군사훈련의 강도를 조절하면서 프로세스의 출발점을 끌어내는 전략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신뢰프로세스가 작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통일에서 찾자는 '통일시대 기반구축' 화두는 탄력을 받을 수가 없다. 통일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로또가 아니며, 준비 없는 '통일대박'은 있을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