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규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규제를 '쳐부수어야 할 원수', '암 덩어리', '죄악'으로 지목하며 청와대에서 규제개혁 '끝장토론'을 직접 주재하고 새누리당과 청와대 정부에 특단의 개혁조치를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의원들의 과도한 입법 경쟁으로 규제가 양산되고 있다며 의원입법에 대한 심사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등 국회에 대해서도 날을 세웠다.
국무조정실이 집계한 우리나라 규제는 지난해 말 기준 1만5070건이다. 이는 중앙정부의 법령에 근거한 규제만 집계한 것으로 지난 10년간 한 해 평균 700건씩이 늘었다.
세계경제포럼(WEF) 조사 결과 144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117위로 규제가 많아 '규제공화국'으로 불릴 만도 하다. 등록 규제 말고도 행정지도ㆍ지침ㆍ권고와 각종 세법ㆍ상법상 규제 등 이른바 '그림자 규제'도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대통령과 장ㆍ차관, 대기업과 중소기업,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대표 등 160명이 머리를 맞대고 7시간 넘게 진행된 규제개혁 마라톤 토론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파격적이었다.
이렇다 할 찬반 격론 없이 준비된 질문에 준비된 답변, 과다한 TV생중계 등 정권 홍보적 요소 또한 적지 않았지만 규제 혁파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정책이벤트로서는 손색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이들 규제 혁파를 위해 "한 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길 때까지 안 놓는 진도개 정신으로 사생결단하라"고 관료들을 다그치고 있다.
당․청이 공조해 규제개혁 로드맵 만들고, 새누리당은 당내 규제개혁특위를 구성해 제도적인 개선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발목을 잡는 경제규제 약 11,000건 가운데 10%인 1,100건을 올해 안에 없애고 대통령 임기 말인 2017년까지는 20%를 없애 5년 전 수준으로 규제총량을 줄인다는 목표다.
'규제'는 '바람직한 사회질서를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기업과 개인의 행위를 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못 팔게 하는 것은 국민 안전을 위해 필요한 규제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강한 규제는 경제활동을 옥죈다. 공익을 위해 필요한 규제와 불필요하거나 발목을 잡는 규제를 구분하는 정책적 지혜가 긴요하다.
김영삼 정부 이래 모든 정권이 규제 개혁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지만 성공한 예가 없다. 김대중 정부 때 국제통화기금(IMF)권고로 '규제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외세의 힘'으로 1998년 한 해만 '반짝'했을 뿐 이듬해부터 규제는 다시 늘었다.
노무현 정부는 규제총량제를 들고 나올 만큼 의욕을 보였지만 결과는 부동산 시장에 '대못'을 박는 것으로 끝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초반 모든 '전봇대'를 뽑겠다며 기세등등했지만 더 많은 전봇대를 전국 도처에 깔아놓고 퇴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투자 활성화를 위해 기업들의 '손톱 밑 가시'를 빼주겠다고 공약했지만 일자리창출과 창조경제, '비정상의 정상화'개혁을 본격 추진하면서 '규제와의 전쟁'으로 확전시켰다. 공직사회의 뿌리 깊은 규제가 경제활성화의 발목을 잡고 있고, 고용률 70% 달성과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의 성패 역시 규제개혁에 달려있다는 게 박근혜정부의 문제인식이다.
박 대통령은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규제 총량제' 카드를 꺼냈다. 부처별 규제 총량을 정해 새로운 규제를 만들려면 기존 규제를 없애도록 하는 방식이다. 영국이 금융위기극복을 위해 2010년 새로운 규제 하나를 만들려면 기존의 규제 하나를 폐지시켜야한다는 이른바 '원인 원아웃'(One In One Out)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당장 규제는 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획기적 규제 개혁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규제개혁의 핵심은 양(量)보다 질(質)의 개혁이다. 역대정권이 규제철폐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것은 규제건수를 줄이는데 만 치중해왔기 때문이다.
공무원 수와 규제총량 간에는 '파킨슨의 저주'가 통한다.
공무원 숫자는 업무의 경중과 상관없이 관료의 필요에 따라 늘어나고, '철밥통'을 지키기 위한 규제는 공무원 권력과 연계돼 따라서 늘어난다. 새 정권이 들어서 규제개혁을 외치면 관료들은 있으나마나한 규제, 자기들에게 별 실속 없는 규제들만을 걸러내 철폐건수 채우기에 익숙해져 있다.
사고가 날 때마다 규제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행정편의주의가 판치고, 인허가 기관이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둔 규제노하우들은 법만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규제라고 다 나쁜 건 아니다. 어떤 규제는 꼭 필요하고, 환경·노동 규제 중 상당수는 국가 기본 틀 유지에 필수적이다. 서부영화에서처럼 '좋은 녀석' '나쁜 녀석' '추잡한 녀석'이 뒤섞여 있어 총량적 접근에 따른 일망타진 작전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일자리창출과 투자활성화를 위해 부처별로 촘촘하게 얽힌 '덩어리 규제', 그리고 보건·의료, 교육, 관광, 금융,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 5대 유망서비스 분야에서의 규제 완화는 바람직하다. 이 경우 개별 건수(件數)보다는 규제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규제를 포함해 사업 추진 전 과정을 원스톱으로 개선하는 시스템을 구축함이 효율적이다.
관료의 '밥그릇'을 위해 존재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들은 퇴출이 마땅하다. 하지만 규제 때문에 기업투자와 일자리창출이 안 되고, '경제민주화'에 편승한 반(反)시장적 덩어리 규제 때문에 한국경제가 질식되어가고 있다는 '규제망국론'은 경계를 요한다.
투자활성화에 맞춰 앞뒤 가리지 않고 규제를 풀다 보면 대기업 편중 현상이 심화될 우려도 있다.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것은 당연하지만 경제의 건전성 유지를 위해 필요한 규제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 1929년 대공황,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렇고,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카드대란이 또한 그렇다.
의원입법이 마치 규제만 양산하는 '황사'처럼 인식하는 것도 문제다.
의원입법 과정에서 정부 관련부처가 상임위에서 입장을 밝히고 정부가 반대하면 법안 통과가 사실상 이뤄지지 않는다. 또 의원입법의 상당수가 사실은 규제심사를 피하고 입법 편의성을 위해 각 부처가 의원들에게 '청탁'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 입법권에 도전하며 국회를 질타하기 보다는 정부 내 관주도 타성과 관료들의 비합리적인 관행을 개혁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규제의 질(質)관리를 위해 모든 규제의 필요성과 적정성을 규제 부서가 규제개혁위원회에 입증토록 책임을 부여하고 입증을 못하면 폐지토록 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나쁜 규제를 없애는 것은 좋지만, 좋은 규제를 무차별적으로 없애는 것은 더 나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규제와의 전쟁은 모든 규제에 대한 총공격이 아니라 나쁜 규제에 대한 정밀타격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