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평행선으로 내달리고 있다. 일본은 내년부터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일본 고유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했다'는 내용을 포함시키고, '국제법에 의한 독도분쟁 해결'을 주장한 일본 외교청서도 함께 발표했다.
교과서 검정을 주도한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은 "자국 영토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타국이 항의할 일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고 나섰다.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독도가 "일본 고유 영토로 현재 한국에 불법 점거돼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이 뭐라고 하던 일본은 요지부동이라는 강력한 마이웨이 선언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핵 안보 정상회담 때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의 중재로 3자회담 형식을 빌어 첫 공식 대면했지만 결과적으로 일회성 해프닝이 되고 말았다.
회담 개최를 앞두고 아베 총리가 국회에서 무라야마(村山)담화 등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 관련 담화를 계승할 뜻을 밝히고, 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를 수정하지 않겠다고 천명하는 등 사뭇 바뀐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회담성사를 위한 분위기 조성 차원이었을 뿐 일본정부 입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한다거나, 위안부 개인에 정부 자금을 직접 제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법적인 문제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모두 해결됐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
우리 정부가 한미일정상회담을 수용한 이유 중 하나로 거론한 군위안부 문제 관련 한일 국장급 회담 추진에 대해서도 일본 측은 "정상회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한국이 정상회담과 연결해 발표한) "의도를 모르겠다"며 불쾌감을 표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이 정상회담을 수용한 것은 동맹국 미국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는데다 한일관계 악화의 책임을 서로 떠안지 않으려는 계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 상태에서 한일관계가 개선의 접점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이 아무리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해도 과거사와 영토문제에 대한 일본 입장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교과서 검정 결과와 외교청서를 같은 날 발표한 것은 어차피 터뜨릴 '악재'를 한데 모아 욕먹을 각오를 하면서 이들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6월말까지 상대를 감정적으로 자극할 일정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달 열리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춘계 예대제(例大祭)때 일본 정부 관계자 및 정치지도자들이 다시 참배할 가능성이 여전하다.
무기수출 금지 3원칙 수정에 이어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확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국민정서와 배치되는 돌발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쪽에서는 국가보훈처장 등으로 구성된 정부 대표단이 다음 달 중국 하얼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아 참배할 예정이고, 민간 차원에서 한·중간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공동 연구도 추진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이 중국과 연대해 과거사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것에 일본은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고, 미국에 위안부기념비 건립과 의회를 통한 동해병기 입법을 추진하는 재미 한국인들의 집요한 노력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있다.
한국과 일본의 내부 사정과는 별개로 이달 말 예정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한국·일본 방문이 한일관계에 하나의 변수가 될 전망이다. 오바마는 미사일방어체제(MD)와 정보협정 등 더 강력한 3국 공조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고,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안보의 축으로 삼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중재를 마냥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베총리는 헤이그 3자 정상회담 때 박대통령에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는 박 대통령의 기조연설 현장에 예고 없이 나타나 앞자리에서 경청하는 등 '튀는' 행보를 보였다.
이것이 미국이나 국제사회에 통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로서는 곤혹스럽다. 일본은 관계 개선을 위한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는데 한국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며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인식을 상당 부분 심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과 우리 정부는 과거사·영토 문제와 북핵 등 동북아 안보문제를 분리 대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일본의 태도가 바뀔 때까지는 관계회복을 시도하지 않고, 미국과 연계한 안보협력은 별개로 다루면서 역사문제 등에 대해서는 중국과 공조를 유지해나간다는 전략인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상대가 바뀔 때까지 마냥 문을 걸어 닫아두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이슈는 유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가는 것이 국가 간의 현실외교다.
역사는 평가하는 사람의 위치나 관점에 따라 서술이 달라지게 마련이고, 더구나 국가 간에 이 평가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일본의 유력 신문 아사히는 "일본과 한국 중국이 안중근의사를 둘러싸고 의견충돌을 하면 생기는 것은 다툼뿐"이라며 "자국의 서술에 갇힌 채 상대의 이해만을 추구하는 행위는 더는 외교가 아니다"고 사설로 주장했다.
서로 마주쳐도 애써 외면하고, 미국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앉은 한일 두 정상 모습을 두고 '어린애 같다'(Childish)는 국제사회의 핀잔은 듣기에 민망하다.
한일 두 나라는 일일생활권에다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갈수록 '생활공동체'로 엮어 가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두 나라간 협력적 리더십은 동아시아 지역공동체 건설을 위해 필수적이고, 갈수록 심화되는 미중 패권경쟁을 완화시켜 동아시아 안정을 도모하는데도 절실하다. 북핵 공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독도영유권은 일본이 뭐라고 하던 우리가 실효지배하고 있고, 과거사문제 역시 국제사회가 우리 주장에 동조적이다. 박 대통령은 "이러려면 무엇 때문에 정상회담을 했느냐"는 국내비판이 무서워 정상회담을 꺼려하고 있다.
하지만 '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는 말이 있다. 합의가 될 수없는 현안은 아예 의제에 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사와 영토이슈에 매몰돼 한·일·중 세 나라 지도자들이 동아시아 평화체제구축이라는 '대국'(大局)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외교가 국민감정의 볼모가 될 수는 없다. 이에 편승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국민을 설득해 극복해내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미국에 등 떠밀려 만나는 것보다는 스스로 주도권을 갖고 한 일 두 정상이 당당하게 만나 따질 것은 따지고 꼬인 것은 풀어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