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대학에 합격한 것도 용한데, 거기에 수석합격이라니, 정말 훌륭해! 자넨 우리 세무서의 자랑이야. 앞으로 세무서 일 걱정은 말고 학업에만 전념하게. 학비는 내가 다 해결해줄 테니, 걱정 말고 공부에만 매진해 보게.”

마음 한구석에 세무서 업무를 게을리하고 몰래 도둑공부를 해 대학에 합격한 사실이 세무서장님의 눈에 안 좋게 비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무서장님의 격려가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 수 있겠냐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다고 업무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다. 일도 공부도 그 어느 하나라도 선배님들께 밉보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인 주경야독 생활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런 이중생활을 계속하면 할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미련이 자라나고 있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던데, 지금 내가 이곳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늦은 밤 강의실에서 공부하는데 계속해서 서울로 유학 간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민은 점점 깊어져 어떤 상실감마저 더해졌다.

‘고민이 길어지면 행동으로 옮기는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그래 조용근! 걱정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내가 원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라 믿고 일단 일을 한번 저질러 보자!’

얼마 후 서울에 있는 성균관대학교 편입 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행 야간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리고 당시 야간 학부 최고의 명문인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당시는 상과)에 편입학 지원 원서를 제출했다. 역시 명문대학답게 2명을 모집하는데, 68명이 지원을 했다. 34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이었다.

하지만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나에게는 엄청난 노력의 산물인 땀과 남들에게는 없는 기도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당히 합격했다. 내가 봐도 신기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합격증을 받아 들고 무작정 당시 조용대 국세청 세정감독관(現, 감사관)을 찾아갔다. 생면부지인 이분은 나와 이름이 비슷하여 먼 친척뻘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남들과 당당히 경쟁하고 싶어 무작정 성균관대학교에 지원해 합격증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대구에서 근무 중입니다. 감독관님께서 저를 서울로 추천해 주시면 저는 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세정감독관은 내 당돌함에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이름을 보니 내 동생뻘이네. 그리고 용기가 가상하구만. 내 자네 같은 젊은이의 꿈을 꺾을 수는 없지. 자리를 알아볼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대구로 돌아가 열심히 일이나 하게나.”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세정감독관은 내 무모한 용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며 인사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적극 추천해 주셔서 성균관대학교와 가장 가까운 동대문세무서로 발령을 내주셨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입성을 하다니······.

다시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에서 하숙하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는 생활을 반복했다. 새로운 생활 패턴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야 한다는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하지만 늘 동경해오던 삶이었기에 직장과 학교를 오가는 고단한 삶에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로 달려가 강의를 듣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이따금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 등의 과제들이 쏟아지면서 주일을 하숙집에서만 보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게다가 이미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를 알게 되면서 내 단단한 신앙생활은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아무리 친구들과의 약속과 밀린 숙제가 있어도 주일예배만은 꼭 지켜왔는데, 한두 번 빠지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점점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출석했던 대구 달서교회와는 달리 서울 동대문에 있는 하숙집 근처의 교회에서 오는 생소함도 당시 나의 게으름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주일만 되면 고향에서 올라온 친구 또는 서울에 이미 올라와 있는 친구들과 명동에서 만나 흥청망청 어울렸다.

그동안 대구에 머물면서 억눌려 있던 자존심이 일종의 과시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래 친구들과는 달리 직장에 다니다 보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찾는 일도 잦았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생활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주일예배를 빼먹고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것 때문에 적지 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처음이 어렵지, 도둑질도 여러 번 반복하면 점점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이미 이러한 생활에서 오는 즐거움에 길들여진 나는 주일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 군에 입대해야 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입영을 연기하는 일에 대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이다. 세상적인 재미에 푹 빠져 너무 몰두한 나머지, 군대에 끌려가기 싫다는 강한 반발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잠깐의 세상적 유혹이 결국 나를 볼품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때 악착같이 주경야독에 힘써야 했었는데······, 그토록 어렵게 공부해서 편입한 학업도 최종 마무리도 짓지 못하고 결국 군입대로 말미암아 복학을 못 한 채 나는 대학교 중퇴라는 학력에 머무르게 되었다.

나는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러던 중 성균관대학교에서 나의 이런 사정과 그동안의 진정성 있는 나눔과 섬김에 감동되었는지 2011년 2월 25일 본교 학위수여식에서 내게 명예졸업장을 주었다. 지금도 성균관대학교에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