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북압박 유지속 고개드는 대화론

오바마, 6년째 '전략적 인내' 고수속 '북핵 논의' 동력 잃어

북핵 협상의 역사적 획을 그은 북·미 제네바합의가 20돌을 맞았지만 미국 워싱턴 내에서 북핵 논의는 사실상 '실종'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핵 불용(不容)과 한반도 비핵화가 여전히 미국 정부의 공식적 목표이지만 실질적으로 북핵 문제를 풀어보려는 정책적 노력은 시간이 갈수록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워싱턴 조야에서는 '북핵 피로'(fatigue) 현상까지 감지되고 있다. 어떤 정책수단으로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오바마 행정부 내부와 전문가 집단 사이에 만연해있다는 게 외교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 중후반기의 '신(新) 외교 독트린'을 제시한 지난 5월말 미국 육사 연설에서나 당면한 대외현안을 열거한 지난달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북핵을 한차례도 거론하지 않은 것은 동력을 잃어버린 북핵 논의의 현주소를 극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북핵 협상의 전범으로 평가돼온 제네바 합의의 파기, 뒤이은 6자회담의 장기 공전, '2·29' 합의 무산, 3차까지 진행된 북한의 핵실험 등 누적된 '외교실패'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당장 '발등의 불'인 중동 문제와 우크라이나 사태에 올인하고 있는 점도 북핵 문제를 후순위(back-burner) 이슈로 만들고 있는 요인이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오바마 행정부의 이 같은 대북정책 기조가 속칭 '전략적 인내'를 넘어 '전략적 무시'로까지 흐르고 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북한이 진정성있는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만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는 '선 조치, 후 대화' 원칙을 고수하면서 북한의 태도변화 전에는 아예 '관여'(engagement) 자체를 하지 않는 전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이 추가 핵실험과 같은 잠재적 도발에 나설 가능성은 대북 지렛대를 가진 중국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국제 비확산 체제에 도전하는 같은 '불량국가'인 이란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상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것과는 차별화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대북 압박기조 속에서 북미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킨 핵심적 외교 틀인 북미 직접대화는 좀처럼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케네스 배를 비롯한 미국인 세명을 장기 억류하면서 전직 대통령의 방북과 같은 '정치적 몸값'까지 요구하자 미국은 유엔 무대에서 '북한인권' 이슈를 끄집어내며 북한의 신경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할 대목은 집권 1기 이후 6년간 유지돼온 오바마 행정부의 이 같은 대북압박 기조가 최근 들어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점이다. 

북한이 아무런 제동없이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는 상황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회의적 시각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시험해보는 탐색적 대화에 나서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제네바 합의에 관여했던 핵심인사들인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북핵 특사, 스티븐 보즈워스 전 대북정책 특별대표, 조엘 위트 전 국무부 북한담당관, 로버트 칼린 전 국무부 정보국장이 대화론에 불을 지피고 있다. 

여기에 오바마 행정부 1기 대북제재 정책을 상징해온 로버트 아인혼 전 미국 국무부 비확산·군축담당 특보까지 북한과의 대화를 주문하면서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 같은 대화론은 최근 한반도주변의 정세변화와도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최근 북한의 유화공세로 남북, 북일관계가 개선조짐을 보이면서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정 정도 힘을 받는 분위기다. 중국도 다음 달 미·중 정상회담을 통해 6자회담 재개에 다시금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 내에서 제기되는 이 같은 대북 대화론이 실질적인 탄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바마 행정부가 오는 11월 중간선거 이후 임기말 업적관리 차원에서 대북정책을 수정할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런 '사정변경' 없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정책기조를 바꿔가며 북한과 직접대화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2·29 합의' 무산에 이어 또다시 북핵 협상이 실패할 경우에 입을 수 있는 '외교적 실패' 논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외교소식통은 "'공은 북한의 코트에 넘어가 있다'는 게 미국의 대북정책"이라며 "북한이 2.29 합의 이상으로 확실하게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 경우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 같은 원칙론적 기류 속에서 한국이 북핵 논의를 능동적으로 주도해가는 외교적 공간이 열릴 수도 있다는 시각이 워싱턴 내에서 나오고 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기반한 남북관계 개선 흐름 속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제를 끌어내고 이를 통해 관련국들의 논의를 이끌어내는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다는 얘기다. 

캐서린 문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위험한 국면으로 치닫는 한반도 정세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는 한국"이라며 "6자회담이 열리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한국의 역할은 약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북한에게 '함께 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외교적 동반자가 한국'이라는 점을 설득시키고 상호 협력의 틀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