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없는 비자금…5만원권 사라지고 고액 뱅크런(bank run)
최근 5개월 사이 은행의 1인당 1억원 이상 고액 예금이 대량 인출됐다.
인출된 금액은 총 485조원. 1년 전과 비교할 때 같은 기간 89조원이 늘었다.
올해 5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실명법) 개정안이 공포된 직후 6월부터 10월까지 금융감독원이 집계한 수치이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5만원권 환수율은 지난 3분기 처음으로 10%대까지 떨어졌다.
금융권에서는 5만원권의 희소 현상이 금융실명법 개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고액을 예금할 경우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이 되거나 자녀 명의 계좌에 분산 예치해도 증여세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차라리 장롱 속에 보관하겠다는 자산가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 개정 금융실명법, 합의된 차명거래도 '금지'= 오는 29일 불법적인 차명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의 금융실명법 개정안이 시행된다.
그동안 금융실명법이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가운데 박근혜 정부 출범 후 CJ그룹과 전두환 전(前) 대통령 일가에 대한 비자금 수사가 확대되며 불법 차명계좌 금지를 위한 논의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20년 동안 차명계좌는 거대 자본과 부유층들의 재산도피처 또는 탈세창구로 활용되어왔다. 페이퍼 컴퍼니뿐 아니라 노숙인의 이름까지 빌려 차명계좌가 만들어졌으며, 향정신성 마취제인 프로포폴 거래에도 차명계좌가 동원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더이상 차명계좌를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하경제를 추적하고 이를 통한 세수 확보를 위해 불법적인 차명계좌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으로부터 제기됐다.
그렇다면 앞으로 시행되는 개정 금융실명법 시행 이후에는 어떤 점이 달라질까.
앞으로는 예금 보호 한도를 지키기 위한 명의 분산 예금, 동창회 등 친목모임의 차명계좌와 같은 '선의의 거래'를 제외하면 모든 차명거래가 금지된다. 기존의 금융실명법이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를 허용한 것과 가장 대비되는 부분이다.
구체적으로는 재산 은닉, 조세 포탈 등 자금세탁, 채권자의 강제 추심을 회피하기 위한 예금 도피 행위 등이 포함된다.
이뿐만 아니라 세금우대 금융상품에 가입하고 가입 한도 제한을 피하기 위해 타인 명의의 계좌에 자금을 분산 예금하는 경우도 불법으로 간주된다.
이를 위반 시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부과 받을 수 있다.
실명이 확인된 계좌에 보유 중인 재산은 명의자 소유로 보기 때문에 차명 거래자가 자신의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법정소송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
이와 함께 금융 실명 거래의 의무는 거래자와 명의자뿐 아니라 금융회사에도 주어진다. 즉, 불법 자금 은닉을 목적으로 하는 차명거래 과정에서 명의를 빌린 사람과 빌려준 사람, 이를 방조한 금융회사 직원 모두 처벌을 받는 것이다.
은행 등 금융회사 직원은 금융거래 시 거래자의 실명을 확인해야 한다. 거래자는 주민등록증이나 사업자등록증, 외국인등록증을 제출해 확인 받아야 한다.
금융회사 직원이 불법으로 차명거래를 알선·중개하거나 설명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는 과태료가 최대 3000만원까지 부과될 수 있다. 기존의 과태료 한도는 500만원이다.
□ 사라지는 '고액 예금'…부작용 우려= 최근 금융권에서는 자산가들이 차명계좌를 정리하는가 하면, 수억원에 달하는 예금을 5만원권으로 인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개정 금융실명법 시행을 앞두고 그동안 차명계좌에 숨어있던 돈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강남의 시중은행 PB는 "고액을 현금으로 인출한 경우 금융당국에 신고하도록 돼 있으나 차명계좌를 정리하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현행 예금자보호법에 따르면 1인당 예금 보호 한도는 5000만원. 은행 파산 시 예금을 돌려받기 위해 가족 명의로 1인당 5000만원까지 분산 예금하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금융실명법 개정 이후에도 순수하게 예금 보호를 받기 위해 가족 명의를 사용하는 것은 합법이나 문제는 금액이 많을 경우 금융소득종합과세 회피 목적으로 의심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시중은행 영업점에 근무하는 직원도 "자산이 많은 고객이 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해 자녀뿐 아니라 친척, 조카 명의의 차명계좌까지 만들었다가 부랴부랴 인출하는 상황이다"고 했다. 이 직원은 또 "아직 지켜보는 고객도 있는 만큼 향후 예금 인출 현상이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예금자 보호를 받기 위해 명의를 빌리는 것은 세금포탈 의도가 없으므로 선의의 차명거래에 해당하지만 실제로는 종합과세를 피하려는 의도가 있으면 불법에 해당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은행의 고액 예금 인출 현상은 예금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법 개정의 취지인 지하경제 양성화에 역행한다는 문제가 가장 크다.
법망을 피해나갈 수 있는 더 깊은 지하로 돈들이 몸을 감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부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표정관리가 안되는 상황이다.
손병두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은 "제도가 바뀌며 국민들이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조금 과장된 측면이 있다"며 "법 개정의 취지가 명백한 불법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고 대다수 선량한 예금주들은 해당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아달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