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베리아산 유연탄 4만500t을 싣고 북한 나진항을 출발한 화물선이 지난달 29일 경북 포항 앞바다로 들어왔다. 이 유연탄은 포스코 전용부두인 포항항에 하역돼 포항제철소 고로의 코크스 원료로 쓰이게 된다.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 남·북·러 물류협력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시범 운송 사업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서(西)시베리아 광산에서 캐 낸 이 유연탄은 철도를 통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산을 거쳐 북한 나진항으로 옮겨진 뒤 한국의 포스코가 임대한 중국선박에 실려 포항으로 운송됐다. 포스코는 석탄대금으로 400만 달러(약 44억원)를 러시아 석탄회사에 지급했다.
러시아 석탄회사는 북한과 러시아 합작사인 ‘라손콘트란스’에 운송비를 지불하고, 이 과정에서 북한은 항만사용료 등으로 총액의 5∼10%인 2억2000만∼4억4000만원의 수익을 얻게 된다고 한다. 천안함 폭침으로 남북 경협이 중단된 5·24 제재 조치 후 4년 반 만에 경협자금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러시아 화물을 북한 항구를 거쳐 한국이 임대한 선박으로 한국 내 수요처로 가져온 이른바 삼각 협력사업 모델이다.
나진〜하산 간 54km 철도와 나진항 화물터미널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최근 개·보수를 마쳤다. 나진항 화물터미널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된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중요 소비국에 천연가스와 석탄 등을 공급하려는 러시아의 중장기 전략에 비추어 하산~나진~동해안 복합운송로 선점은 막대한 경제적 실익을 점치게 한다. 나진항을 경유한 육·해로 복합운송은 다른 경로에 비해 약 하루 반의 시간과 15~20%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포스코와 코레일 현대상선 3사로 구성된 우리 기업 컨소시엄은 북·러 합작회사 라손콘트란스의 러시아 지분(70%)의 절반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 프로젝트 참여를 추진 중이다.
3사는 이번 시범운송에서 드러난 사업성과 위험요인을 면밀히 분석해 본계약 체결에 임할 예정이다. 시범사업 점검 차 방북했던 컨소시엄 관계자들은 “철도운송과 항만운송을 연계하는 프로세스 점검차원에서 갔는데 나진항 설비나 철도운용설비는 생각보다 좋았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북측이 적극적이고 우리 정부 또한 나진-하산프로젝트를 5·24대북제재의 예외로 인정한데다 ‘남·북·러 삼각협력의 시발점’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본 계약이 체결되고 사업 참여가 공식화되면 남북차원의 추가경협 추진 등으로 남북관계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북·러 관계는 최근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의 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급속히 진전되는 양상이다. 핵문제와 인권문제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있는 북한은 러시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여 탈출구를 찾으려하고, 우크라이나 사태로 유럽과 소원해진 러시아는 ‘신동방정책’으로 극동개발을 본격화하는 등 이해가 맞아떨어지고 있다.
북·러 간 교역량은 1억 달러 남짓에 불과하지만 2020년까지 양국은 교역량을 10억 달러까지 확대키로 목표를 정했다. 러시아는 북한의 부채 110억 달러를 탕감했고, 하산〜나진 간 철도 연결 사업에 이어 북한 철도 현대화와 지하자원 채굴을 함께 진행하는 ‘포베다(승리)’사업에도 착수했다.
러시아 회사가 북한의 희토류, 금속류, 석탄 등을 채굴 판매하고 이를 통해 확보된 자금을 북한 정부가 철도현대화 사업에 다시 투자하는 사업구조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통해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동시에 남·북·러 가 함께 참여하는 동북아 대규모 협력 사업들로 확대해나간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남북한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사업, 러시아 가스관을 북한을 통과해 한국까지 연결하는 사업, 그리고 러시아 전기를 남북한에 제공하는 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큰 틀 속에서 러시아는 북·러 간 그리고 한·러 간 양자 대화들을 병행해 나가고 있다.
다만 북한의 핵개발프로그램과 2008년 이후 남북관계 악화로 인한 한반도 긴장상태의 지속 때문에 이들 경제협력 사업논의들이 지체되고 있을 뿐이다.
북·러 간 밀착은 동북아 외교에 새로운 변수로 주목되고 있다. 나진항은 이미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가 맞닥뜨리는 국제항으로 급부상했다. 중국은 나진항부두를 임대해 자국물품을 배에 실어 동해와 대한해협을 통해 상해 등지로 수송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동북3성(요령·길림·흑룡강성)및 창지투(장춘·길림·두만강지역)개발계획은 물류 인프라 구축과 동해쪽 출구 필요성을 크게 높였다. 중국남부로 기존 육로를 통해 물자를 옮기는 것 보다 동해를 통하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동해수송로가 열리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대륙으로 향하는 물류도 탄력을 받는다. 황해시대를 대체하는 ‘환동해시대’의 개화를 위한 물적·정책적 여건은 무르익고 있다. 우리철도가 북한을 지나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나 중국 철도에 연결되는 ‘철의 실크로드’ 유라시아 이니시어티브 구상과도 맥이 통한다. 게다가 지구온난화 진행으로 북극해를 지나는 북극항로가 현실화될 경우 네델란드 로테르담까지 기존항로(2만100km)로 24일 걸리던 것이 동해 를 거쳐 북극항로(1만2700km)로 가면 14일로 단축된다.
최근 남북한과 미국·중국·러시아·일본 6개국 간 동북아 외교전은 그 때 그 때의 이해관계나 현안에 따라 손을 잡기도 하고 등을 돌리는 등 외교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박근혜대통령은 나진-하산 물류사업 등 남·북·러 협력사업과 함께 신의주 등을 중심으로 남·북·중 협력 사업을 추진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공동발전을 이루겠다고 드레스덴 선언에서 밝힌 바 있다. 지난 달 초에는 중국 측에 남·북·중 협력 틀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러 협력으로 북·중 협력과 균형을 맞추고, 남·북·러·중 모두가 상호경쟁과 협력 속에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며 동북아 안정과 평화를 정착시키는 이니시어티브가 절실한 때다.
남·북·러 던 남·북·중이던 삼각협력 틀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북한과의 꽉 막힌 양자관계를 풀어야한다. 양자 간 신뢰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3자협의체가 어떤 성과물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진-하산프로젝트의 본 계약이 내년 초 체결되어 남·북·러 삼각협력의 물꼬가 트인다면 남북관계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북한이 올해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년 탈상’을 하고 분단 70주년인 내년에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도력을 과시하고자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집권 3년차를 맞아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고, 남·북·러 협력사업과 남·북·중 협력 틀 같은 다자적 의제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한과의 양자관계 개선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모멘텀을 잡으려는 정책의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