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법률주의(租稅法律主義)'
조세의 부과 및 징수는 반드시 국회에서 제정하는 법률에 의해야 한다는 헌법 조항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고 있는 신성한 납세 의무는 조세법률주의 틀 안에서 효력이 발생한다.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이유는 국민 개개인이 법률제정에 참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소수의 대표자를 뽑아 그들에게(국회) 법률제정권을 부여한 것은 국민들의 권익보호에 부합하는 올바른 법률을, 정해진 절차를 준수해 가며 제정해 달라는 준엄한 명령이 담겨 있다.
국회의 구성원들인 의원들의 어깨에는 이처럼 무거운 국민들의 요구가 얹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수 년 동안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보면, 과연 국회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법률제정권을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허구헛날 '국민'을 운운하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국민을 '봉'으로 만들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언론들은 일제히 새해(2015년) 예산안 법정시한 처리를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정의화 국회의장도 여야 지도부들도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켰다며 자신들의 '치적'을 스스로 치켜세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새해 예산안을 법정시한 내에 처리했다는 점은 긍정적 평가를 받을만한 대목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회 스스로 법률제정권을 남용하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조세법률주의마저 훼손했다는, 일그러진 진실이 숨어있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세법개정안의 논의과정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7~8차에 걸쳐 진행된 조세소위를 통해 여야는 크고 작은 세법개정 사항에 대해 합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도가 높은 세법개정 사항(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 패키지, 담배 개별소비세 신설 등)에 대해서는 합의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2일 새해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부의되면서 정치권이 만들어낸 결과는 '야합'에 따른 수정동의안이었다. 이전까지 부자감세, 서민증세를 입에 담으며 반목을 거듭했던 여야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들의 정치적 실리를 얻는 방향의 수정동의안을 만들어 냈다.
오죽이나 대충했으면, 본회의 반대토론에 부딪혀 여야 원내대표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상속증여세법 수정동의안(심지어 원안까지)이 부결되는 황당한 상황까지 연출됐다.
담배 개별소비세 신설도 마찬가지다. 생각지도 못한(?) 표 이탈 현상에 놀란 여야는 본회의를 정회하고 부랴부랴 표 단속에 나서, 관련 법안(개별소비세법 개정안)의 무사통과를 이끌어 냈다.
지난 2011년 12월31일, 국회는 소관 상임위에서 논의됐던 내용을 완전히 뒤집고 '한국판 버핏세'로 통칭되는 소득세 최고과표구간 및 세율 상향조정 법안(소득세법)을 표결에 붙여 기습적으로 통과시킨 바 있다.
이 법안은 시행 채 1년도 되지 않은 지난 2012년 말 재조정됐다(최고세율 적용 과표구간 3억원→1억5000만원). 지난해에도 여야는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세 폐지 등이 담긴 세법개정안과 건물 임대차보호법 등 자신들의 정치적 실리를 챙길 수 있는 법률안을 맞바꾸는 '빅딜'을 만들어냈다.
이 같은 일련의 법개정 과정에서 '국민'은 없었다.
오직 '정치'만 있었다.
크든 작든 국민들의 재산권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세법개정 사항을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져 만들어낸다는 것이 용납될 수 있는 일인가. 이러한 행태는 국민들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고, 법률제정권의 사용을 허락받은 국회가 국민에게 보여줄 모습이 아니다.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조세법률주의는 국민들의 뜻이 담기지 않은, 몇 명의 정치인들의 의견만으로 뚝딱 만들어진 '졸속' 세법까지 용인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지 않다.
국민들은 그저 여야의 정치적 선택에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그런 존재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치권에 되묻고 싶다.
정치권은 재계를 비롯해 수많은 조세전문가들이 문제점을 지적한 사내유보금 과세제도(기업소득 환류세제) 등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원안 그대로 통과시켰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대로 이 제도가 경제활성화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국민적 찬반논란이 극심한 담뱃값 인상문제의 처리과정도 그렇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지만(?) 2006년 담뱃값을 500원 올리면서도 공청회 등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 처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런 과정도 없었으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입법예고 기간을 거쳐 예산안 법정시한 처리를 빌미로 한 순간에 무려 2000원이나 가격을 올려놓았다.
이는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가한 명백한 '횡포'다.
지난 2일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킨 후 본회의장을 나선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그동안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법을 지키지 않아 죄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그 법(국회선진화법)을 지키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회선진화법을 지켰다고 해서 '죄의식'을 털어냈다는 그의 말에 참담함마저 느껴진다.
국민들에게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모를 조세제도의 근간이 되는 법률개정안(세법)을 정치적 야합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국민의 여론이 무시된 ‘악법(惡法)’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이를 강요하는, 조세법률주의를 농단한 것에 대한 죄의식은 도대체 어디다 팔아먹었다는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