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울세관 서경호 관세행정관이 작성했습니다.)
사건의 전말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자료는 1톤 트럭 1대 분량이었다. 자료가 방대해 팀원 모두가 1주일동안 밤낮없이 자료와 싸웠다. 자료를 통해 A사는 2005년까지는 금형을 수주해 정상적으로 수출하고 있었으나 2006년부터 무역보험공사의 보증을 받아 수출채권을 금융기관에 매각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허위 수출거래를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A사가 수입대금 지급명목으로 일본지점으로 송금한 자금의 경우, 이 자금이 국내에 상환되는 것으로 판단했으나 사장의 자택에서 압수한 자료에서는 실제로 A사가 구매자로 신고한 일본계 다국적 기업인 M사 계좌로 자금이 이체된 것으로 확인된 것. '이건 뭐지? 왜 실제로 돈이 M사로 가는 걸까? A와 M사가 공모한 것일까?' 압수자료를 분석하고 있는 난 너무 혼란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압수자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서류가 하나 있었다. 처음 보았을때는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는데, 재검토 과정에서 살펴보니 그것은 일본의 M사 명의로 개설된 계좌에서 국내로 자금을 송금하는 송금신청서류였다.
송금신청서류에 적힌 M사의 주소에 주목했다. 서류에 기재된 주소는 실제 M사의 주소가 아니고 A사의 일본지사 주소가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실제 M사의 한문명을 찾아보니 송금신청서류에 기재된 M사의 한문표기와 달랐다.
주변에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니 한문표기는 다르지만 일본의 히라가나로 표기할 경우 같은 발음으로 표기된 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랬다. A사가 일본지점으로 송금한 자금이 흘러들어간 M사는 A사 대표가 일본계 다국적기업인 M사와 동일한 이름으로 별도로 만든 페이퍼컴퍼니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A사가 한국에서 일본지점으로 송금된 자금이 A사 대표가 관리하는 페이퍼컴퍼니인 M사 명의 계좌로 들어간 뒤 다시 한국으로 송금되는 순환구조의 자금흐름을 밝혀낸 것이다. 그리고 A사 대표가 M사 명의 계좌에 입금된 자금중 28억원 상당을 미국에 거주중인 본처에게 생활비 명목으로 지급해 빼돌린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혐의 시인
5월 11일 경리과장을 소환해 피의자 신문조사를 했다. 경리과장은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월급쟁이로 사장이 시키는대로 또는 기계적으로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고 별다른 의심 없이 허위수출서류와 은행에 수출채권을 매각하는 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맞는 것 같다.
자료를 찾아 보아도 경리과장은 1000억원이 넘는 사기 대출이라는 엄청난 일에 가담하고 있으면서도 별도의 대가를 받은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출신고 가격이 허위라는 것을 인지하고 허위서류를 작성해 일본의 지사에 대금을 송금한 행위자로서 책임은 면치 못하리라.
오전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경리과장을 통해 사건 전반에 대해 모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A사 대표에 대한 조사만이 남았다. 그는 오전에 출석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저녁 7시에 출석하는 것으로 사장의 변호인과 약속을 정했다.
은행돈 수백억원을 빼돌려 람보르기니와 같은 초고가 외제차량 10대를 리스운용하는 등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초호화생활을 영위하는데 사용한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피의자가 출석하고 피의자의 모습을 본 순간 너무나 초췌한 모습에 난 당황스러웠다. 그는 피의자신문조사를 받는 내내 무엇인가에 쫒기는 것 같았고, 계속 손을 떨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세관에서 압수수색을 한 이후 매일 술로 지새웠다고 했다. 그리고 무역보험공사의 수출보증제도를 악용해 세관에 허위로 수출신고하고 이를 은행에 매각하는 방법으로 1522억원에 이르는 금융자금을 편취했으며 이중 일부자금을 국외로 빼돌려 해외거주중인 본처 생활비 명목으로 사용한 사실을 모두 순순히 시인했다.
구속 그리고 가족은?
A사 대표의 범죄행위로 인한 금융기관의 피해규모가 347억원에 이르는 등 사안이 매우 중하고 피의자가 증거인멸 및 도망의 우려가 매우 높아 우리는 사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2시간여에 걸친 영장실질심사가 끝났고 심사결과가 나올 때 까지 수서경찰서 유치장에 입감하기 위해 사장을 데리고 경찰서 옆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사장은 식당에서 청국장을 시키더니 너무도 홀가분하게 한 그릇을 뚝딱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들키기 전까지는 조마조마해도 막상 들키고 나면 홀가분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흡연자인 사장을 위해 유치장에 들어가기전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우도록 했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한국에 있는 사실혼 관계의 여자와 아직 10살 안팎인 두 아들들이 살아 갈수 있는 길은 마련해 두었냐고 물었다.
사장은 담배만 피우며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12시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그렇게 피의자는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