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생명의 근원지…희귀 식물의 보고
누군가 나에게 제주도가 어떤 곳이냐고 물어오면 제주도는 '말(言)이 잘 통하는 외국'이라고 늘 말하곤 한다.
제주공항에 첫 발을 디딘 순간 코끝으로 느끼는 바람마저도 낯설게 느껴지는 섬,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린 바다 빛, 처음 듣는 낯선 단어들을 맞닥뜨리는 순간 느끼는 설렘은 여행자에게 제주가 주는 이국의 향기다.
그래서인지 늘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제주는 여전히 외국이다. 아니 어쩌면 이국의 향기를 맡아야 불현 듯 나타나는 역마살을 잠재울 수 있기에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지도 모르겠다. 제주는 늘 새롭고 어제와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아름다운 여행자와 그 느낌을 아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천년의 신비를 품은 곶자왈은 제주의 가장 이국적인 환경이며 큰 보물이다. '곶'은 제주어로 숲이라는 말이며 '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제멋대로 마구 엉클어져서 넝쿨같이 뒤엉켜있는 모습의 땅을 일컫는 말로 자갈밭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돌이 많고 나무뿌리가 뒤엉켜져 있는 땅이라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에 곶자왈은 나무를 잘라 숯을 만들고 약초나 캐는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제주 생명의 근원지임이 밝혀지고 수많은 희귀 식물과 작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음이 알려진 후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보물임을 모르고 버려져 훼손되고 난개발로 몸살을 알았던 곶자왈 살리기 운동이 제주도민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이런 태고의 신비를 안고 있는 제주의 심장 곶자왈 체험을 빼놓는다면 생명력이 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제주의 숲길이 대부분 곶자왈이다. 자연이 만든 숲의 신비를 느끼고 자연과 하나 되어 숨 쉬는 치유의 여행길을 떠나보자.
◆…5.16도로의 한라생태숲
한라생태숲, 4계절 언제 걸어도 좋아
한라산 서쪽 자락에 위치한 한라생태숲은 5.16도로를 차로 달리다 자칫 지나쳐버리기 쉬운 곳에 있다. 이곳 생태숲길은 4계절 언제 걸어도 좋은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면 바로 앞에 정류장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만약 차를 몰고 갔다면 주차장에 주차하고 전망대에 오르면 뒤로 한라산 백록담의 머리가 보이고 앞으로는 제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입구의 푯말을 보면서 어디를 걸을 것인가 정하고 걷는 것이 좋다.
◆…한라생태숲 안내판
생태숲 4킬로미터 정도를 걷는 데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18개의 테마로 만들어진 숲길은 계절마다 꽃이 피고 진다.
개오리오름에서 다시 생태숲길을 돌아 나오는 길은 2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만약 개오리오름을 지나 절물오름까지 걷는다면 5시간은 넉넉히 잡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여름은 아무리 숲길이라 해도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게 모자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또 하나 함께 걸을 친구도 필요하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여행은 혼자 해도 좋지만 숲길 걷는 여행은 꼭 친구와 동행하길 바란다.
다만 친구와 대화하는 것은 잠시 미루고 각자 숲의 나무와 돌과 대화를 나누고 걸어야 숲을 기억하게 된다. 이곳의 700여 가지의 나무와 풀과 꽃은 여행자가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다.
◆…수련이 예쁘게 자라는 습지
한라생태숲이 2009년 일반인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는 목장지로 숲이 훼손되어 쓸모없는 땅으로 버려두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옛날 이 지역은 제주어로 숯을 만들던 동산이라는 이름의 숲모르라 불리던 곳이다.
그만큼 나무가 많이 잘 자랐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나무는 다 땔감이 되고 숲은 야초지가 되어 버려졌던 곳을 10여 년이 걸려 개오리오름~절물오름 산책로로 탈바꿈시켰다.
6월부터 산수국이 피기 시작하면 제주 나비들도 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곶자왈 깊은 곳에 유난히 많이 서식하는 산수국은 숲의 공주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나가 춤추고 있는 듯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국의 꽃잎이 뒤집어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비와 사랑을 나누었기에 수줍어 고개 돌린 모습이다.
◆…초여름 제주를 아름답게 유혹하는 산수국
숲길에서는 풀 한포기 나뭇가지 하나도 손대지 말아야 한다.
붉은 보석을 도도하게 몸에 두르고 한손을 올려 잘난 체 하는 모습의 천남성은 쉽게 다가서면 안 되는 식물이다. 장희빈이 마셨던 독약에 넣었던 것으로도 알려진 독초로 손으로 만지면 마비가 온다고 한다. 이밖에도 아름답게 보이지만 독버섯이거나 독초가 많다.
편백나무 이어지는 숯모르 길
한라생태숲의 옛 이름이었던 숯모르 숲길을 걸어보자. 편백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8킬로미터로 개오리오름까지 쉽게 걸을 수 있다.
개오리오름은 제주어로 세 개의 분화구가 가오리같이 생긴 모양을 일컬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견월악(犬月岳)으로 표기해 원래의 이름과 전혀 맞지 않게 표기되어 있다. 다시 제 이름으로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멀리 개오리오름이 보이는 방목지
개오리오름으로 가는 길에 절물오름과 다시 생태숲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길은 절물오름 방향으로 걷기보다 다시 생태숲으로 방향을 돌려 생태숲길의 여러 숲을 보는 것도 좋다. 생태숲의 여러 길에는 쉴 곳이 많으므로 도시락을 가져와 아이들과 하루를 보낼 만하다.
개오리오름을 오른 후 절물오름까지 계속 이어지는 편백나무 숲길은 그야말로 자연 치유의 길이다. 한참을 걷다 멈춰 서서 바라보는 하늘은 숲을 향해 푸른 빛을 뿌리고 있고, 깊게 들이마시는 나무의 향기는 어느새 오감을 다 씻어 새롭게 만들어준다.
이토록 아름다운 길도 먹을 것 하나 심어 자라지 못하는 땅이라 구박을 받았다니 지금의 풍요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마저 든다.
◆…편백나무 숲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가슴 안의 폐까지 푸르게 물들어가는 느낌과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어느새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발길에 닿는 나무의 뿌리는 땅속이 아닌 돌무더기와 뒤엉켜 있고 물길을 찾아 뻗어내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분재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술이다.
◆…마방목지의 평화로운 풍광
한라생태숲을 나와 한라산을 향해 조금만 걷다보면 넓은 초원과 말들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곳에서 말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은 평화롭고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다.
제주10경에 들어가는 곳이니만큼 한번쯤은 초원에 말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모습을 여유 로이 즐겨보는 것도 좋다. 관광객들이 늘면서 말들도 모델 역할을 톡톡히 잘해주고 있다. 겨울에는 이곳 마방목지가 눈썰매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관광객들 가까이 모델이 되어 주는 말들
마방목지를 지나 20여분을 더 걸어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으로 걸어가면 교래리로 들어서는 길이다. 이 길은 드라이브하기 좋은 제주의 길 중 하나로 길이는 약 5킬로미터, 걸어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
아침 일찍 서둘러 휴양림을 보고 점심을 먹은 후 마방목지에서 차를 한잔하고 이 길을 걸어보길 권한다. 가는 길에 사려니 숲길을 잠시 걸어도 좋다.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한 길
또 걷다보면 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이라 드레스를 입은 예비신부와 한껏 멋을 낸 예비신랑의 사랑스러운 웨딩촬영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요즘은 중국인들도 결혼 전에 이곳 제주도에서 웨딩촬영을 위해 많이 오고 있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 때문에 이 길이 더 이국적으로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숲속에서 웨딩 촬영 중인 모습
교래리 마을에서 맛있는 토종닭 요리를
숲길을 걷고 난 피로는 맛있는 요리로 풀어보자. 교래리 마을로 들어서면 제주 토종닭 샤브샤브와 백숙 등 다양한 닭 요리를 맛 볼 수 있다.
교래는 토종닭 특구로 지정돼 있어 닭요리를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제주토종닭은 유난히 쫄깃하고 맛있다. 팔팔 끓는 육수에 제주에서 나는 여러 가지 채소와 닭 고기를 넣어 즉석에서 끓여먹는 샤브샤브와 살을 발려내고 남은 닭고기에 감자와 녹두를 넣어 만든 찜과 죽까지 한상 차려나온다.
잠도 교래에서 자는 것이 좋다. 숲속의 공기를 맡으며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이 더 상쾌해질 것이다. 교래에는 그래서 팬션들이 많다.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한 숲과 운이 좋으면 숲길에 지나가는 노루도 볼 수 있다.
이경화 칼럼니스트(제주시대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