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29일 1차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3090명 중에는 일본 천황에게 작위를 받은 매국(수작·습작자) 행위 대상자 133명이 들어 있다. 이들 '수작자'들은 나라를 판 대가로 작위뿐만 아니라 땅과 은사금 등 물질적 보상도 함께 받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이들의 '작위'는 물거품이 됐고 물려받은 땅도 몰수됐지만, 친일 행위자와 후손들의 뻔뻔함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광복 6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 8월 14일 여든두살의 김아무개씨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땅 4537평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김씨는 왕실 종친으로 일본에 궁내 동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는데 협력한 이재극의 손주며느리. 당시 이재극은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천황으로부터 남작 작위와 경기도 파주군 일대 등 모두 17만8000여평의 땅, 은사금 2만5000원을 받았다.
김씨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이유는 친일의 대가로 얻은 시아버지 땅을 돌려달라는 것. 김씨는 지난 1996년에도 경기 파주시 인근 도로 97평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서울지법 민사합의14부(재판장 이선희)는 "친일파 후손의 재산권은 보호할 가치가 없다"며 이를 각하했다.
김씨의 경우처럼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은 지금까지 모두 35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재판부 판결이 난 사건은 16건. 그중 절반인 8건에서 친일파 후손들이 승소했다.
16건 중 8건 친일파 후손이 승소
대표적 친일파로 알려진 송병준의 후손들도 '땅 되찾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일진회 총재를 지낸 송병준은 정미조약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한 대가로 경기도 고양군 외 161만9000평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땅과 함께 자작 작위를 받았다.
송병준의 후손 송아무개(60)씨 등은 최근까지 국가를 상대로 모두 4건의 토지반환 소송을 냈다. 이중 2건은 패소했고, 1건은 소취하했으며, 나머지 1건은 1심 재판이 진행중이다. 현재 진행중인 토지반환 소송은 부평 미군부대 부지 13만평에 대한 것. 이 땅의 공시지가는 약 3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송병준이 친일을 대가로 받은 땅이 이처럼 막대하기 때문에 후손들 사이에서는 다툼도 벌어지고 있다. 송병준의 또다른 증손자인 송아무개(73)씨는 지난 3월 "동생들이 나를 상속에서 제외시키려고 음모를 꾸몄다"며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다.
을사오적의 우두머리로 지목되는 이완용의 후손들도 재산 찾기에 적극적이다. 이완용은 일제의 조선 강점에 앞장선 대가로 경기 김포군 외 106만평에 이르는 땅을 하사받았다. 또 사망 당시 작위는 백작에 이르렀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모두 17건의 토지 반환 소송을 벌였고, 실제 재판에서 승소해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일대 토지 소유권을 가져가기도 했다.
을사오적 중 한명인 이근택과 그의 형 이근호의 후손들도 줄기차게 소송을 걸고 있다. 을사늑약 당시 군부대신이었던 이근택과 이근호가 받은 땅은 경기 여주군 일대 등 모두 40만평 정도. 두 사람은 각각 자작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근호의 손자 이아무개(78)씨는 지난 2003년과 2004년 사이 오산시와 화성시, 음성군 등 경기도와 충북도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4000평 가까운 토지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이 땅의 공시지가는 15억원 정도지만, 실거래가는 60억원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한 친일파 후손이 사찰을 상대로 토지반환 소송을 냈다가 취하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 왕가 출신으로 일제 강점을 도와 1910년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창의 후손 21명은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 내원암 경내 4만8000평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이해창은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을 도운 공로로 내원암 인근 14만여평을 하사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 18일 이해창의 후손들은 봉선사를 상대로 낸 토지소유권 확인 소송을 돌연 취하했다.
이에 앞서 봉선사는 지난 8일 서울중앙지법에 "민법상의 소유권 규정을 반민족행위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하는 것은 3·1정신 계승을 표방한 헌법 전문에 반한다"며 서울중앙지법에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제출했다. 이해창 후손들의 소유권 확인소송을 계기로 친일파들의 토지반환 소송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다.
친일파 재산환수특별법 계류중... 사법부도 심사 미뤄
이처럼 친일 행각으로 얻은 재산을 되찾으려는 친일파 후손들의 움직임이 늘고 있지만 소송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친일파 후손들의 토지반환 요구가 국민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데다 법적 조치까지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는 이미 지난 2월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을 발의(169명 서명)해 계류된 상태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땅을 돌려달라"는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도 더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 입법에 맞춰 친일파 후손들의 토지 반환 소송 심사를 미루고 있다. 최근 수원지법은 친일파 이근호의 손자 이아무개씨가 낸 7건의 토지반환 소송 중 5건의 심사를 미뤘다. 수원지법 관계자는 "법에 따라 재판하는 법원이 소송의 승패에 직접 영향을 주는 관련법이 발의된 상황에서 섣불리 판결하는 건 옳지 않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