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에서 재무부로 전입한 후 첫 근무지는 세제국 국제조세과(사무관)였다. 당시 재무부의 꽃은 힘과 권위의 대명사처럼 불려온 이재국이었으나 나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흔히 "모피아"(MOFIA, 재무부의 MOF와 마피아 합성어)로 불리는 재무부의 막강한 힘은 대부분 바로 이재국에서 나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 재무부에서 가장 기피하던 곳이 세제국이었고 세제국 내에서도 국제조세과는 대표적인 비선호부서였다. 국제조세과는 외국과 이중과세방지협약을 체결하고 비거주자 조세정책을 수립하는 부서여서 업무는 어려운 반면 소위 힘이 없는 곳이어서 인기가 없었다. 나는 여러 부서에서 다양한 업무를 해보고 싶었지만 1985년 말 서기관 승진할 때까지 6년여를 남들이 꺼리는 국제조세과에서 일해야만 했다. 그 이후에도 금융 관련 보직에는 접근이 어려웠고 주로 세금분야에서 근무하였다.
내가 사무관 과장 국장으로 일했던 1970년대∼90년대는 연고주의가 매우 심했던 시절이었다. 농경사회와 산업사회가 혼재된 때여서 사회가 투명하지 못해 비밀이 많았고 변화도 느렸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혁신적인 사람보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선호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학연 혈연 지연이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경제 관료들이 군웅할거 하던 재무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력이나 출신이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 속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란 출신성분 때문에 일종의 ‘희귀종’ 취급을 받으면서 공직생활 전반 20여 년을 참으로 힘들게 보내야 했다. 면(面)에 소재한 중고등학교와 지방대학을 나온 전라도 출신은 재무부에서 그야말로 비주류의 종합세트였다. 조직을 통틀어 찾아봐도 선후배 등 연고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인사나 업무에서 소외당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에베레스트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은 히말라야산맥에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산맥에 있으면 돌덩이 하나도 높은 산이 된다. 그러나 나는 산맥은커녕 기댈 언덕조차 없었다. 대단한 학력의 '엘리트' 공직자들과의 경쟁에서 비주류로 출발했던 나는 남들보다 두 배로 노력해야 했다. 이런 환경은 나에게 연고 때문에 차별받는 일이 없는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심어주었고, 훗날 기관장이 됐을 때 철저하게 연고주의 인사를 배제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인생사 새옹지마고 전화위복이다. 화가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 삶이 그러했다. 나의 성장 배경과 출신성분이 한때는 내게 좌절과 아픔을 주기도 했지만, 이러한 불리한 조건들이 오히려 도전 정신과 인내심을 키워주었으며, 더욱 노력하고 청렴하고 겸손하도록 나를 강하게 단련시켰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성실하고 능력 있는 공직자라는 평가가 쌓여 결국 실력으로 연고주의를 뛰어넘는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오랜 세금분야 근무를 통해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조세전문가로 성장했다. 내가 85년에 썼던 ‘국제조세’는 오랜 기간 이 분야의 최고 전문서적이 되기도 했다.
내가 공직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특히 두 분과의 만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선 1997년 12월 고졸 학력의 전남 출신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연고주의 악몽에서 벗어나 능력 위주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당시 재정경제부(재무부의 후신) 국장급 이상 본부 간부 중 유일한 호남 출신이었던 나는 김대중 정부 5년 동안에 국장에서 1급으로 승진하여 재정경제부 국세심판원장과 세제실장을 거쳐 차관급인 관세청장까지 역임할 수 있었다. 1급 국세심판원장으로 승진했을 때는 모일간지에서 이용섭원장 때문에 재경부 1급 7명이 모두 서울대 출신이라는 오명(?)을 벗었다고 보도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전에 김대중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고 소위 동교동 정치인들과도 어떤 인연이나 관계도 없었다.
내 공직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노무현정부 시절이었다. 국세청장→청와대 혁신관리수석→ 행정자치부장관→ 건설교통부장관까지 내 공무원 생활의 전성기였다. 노무현 대통령 및 그 주변 분들과 전혀 인연이 없었는데도 이처럼 계속해서 중용한 이유로 청와대는 혁신성을 꼽았다.
노무현정부 5년을 관통하는 정신은 ‘혁신’이었다. 대통령께서는 정부혁신을 보다 종합적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대통령비서실에 혁신관리수석비서관을 신설하고 2005년 4월 나를 초대 혁신관리수석으로 임명하셨다. 국세청장 2년 기간 동안에 이룬 접대비실명제 등 많은 혁신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다음 해인 2006년 3월 2일, 대통령께서는 4개 부처의 개각을 단행하면서 나를 정부혁신을 총괄하는 행정자치부 장관 내정자로 발표하셨다. 공직생활 32년 만에 공무원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위원이 된 것이다. 후에 둘만의 오찬 자리에서 장관 내정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자 대통령께서는 빙긋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시면서 “인연입니다. 혁신으로 맺은 우리 인연이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좋은 성과를 내주십시오” 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나 나는 행정자치부 장관을 오래하지 못했다. 참여정부 말에 집값이 급등해 온 나라를 들끓게 했다. 나는 집값을 안정시키라는 특명을 받고 행정자치부장관 재임 8개월만인 2006년 12월 11일에 건설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집값은 분양가상한제와 원가공개제를 주 내용으로 한2007년 1·11 대책 등에 힘입어 2007년 후반기부터 안정세로 전환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나 학력과 연고보다 혁신성을 중시했는지 잘 나타내주는 강의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지금 저도 인사를 해보지만 역시 서울대, 연대, 고대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방대학 출신들, 지금 쟁쟁한 자리에 다 있습니다. 지금 건설교통부 장관 하는 분은 국세청장 했는데, 국세청장하고 청와대 혁신수석 하다가 거기서 또 일 잘해 가지고 행정자치부 장관 갔다가 거기서 또 일 잘해서 자기 임기도 못 채우고 건설교통부로 또 발탁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성실하게 하고 항상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끊임없이 불편을 해소해 나가려는 그런 창의적 창조적 자세, 도전적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요, 설사 대학교 좀 이름 없는데 가도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어요.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2007년 4월 8일 노무현대통령 EBS 특강 중에서)
또 하나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항로를 완전히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공직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께서는 나에게 정치를 하라고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었지만, ‘세상의 큰일은 정치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고, 정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말씀을 가끔 들려주셨다.
그간 공직생활하면서 정치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결국 나는 2008년 4월 7일 치러지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그해 2월 1일 건설교통부장관을 사직했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들은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나는 분명 성공한 공직자였고 가는 곳마다 혁신을 통해 많은 변화를 일으켰지만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향한 내 꿈은 여전히 큰 진전이 없었다. 공직자로서는 내 꿈을 이루는 데 현실적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던 때라서 대통령 말씀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光州에서 18대와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누구보다도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특히 당시 정치권의 주요 쟁점이었던 ‘부자감세’ 논란 과정에서 그리고 세법을 다루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조세제도 선진화를 위해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세금은 조세법률주의가 기본원칙이기 때문에 국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세법이 원체 복잡해서 국회에서 심도 있는 심의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이런 전문성 부족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중요한 공직을 두루 하다보니까 사상 최초로 3번의 국회인사청문회(국세청장 행정자치부장관 건설교통부장관 청문회)를 거쳤으나 공직생활 내내 척박한 환경에서 절제된 생활을 한 덕분에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다음회 예고 : ③ 참여정부 국세청장으로 발탁 배경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