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상설중재재판소, 한국 정부의 '개입 책임' 사실상 인정
국정농단·이재용 삼성 경영권 승계 의혹과 결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CG) [연합뉴스TV 제공]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둘러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 한국 정부의 국제중재 재판이 약 5년 2개월 만에 엘리엇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국제 상설중재재판소(PCA)의 엘리엇 사건 중재판정부는 20일 엘리엇이 한국 정부에 요구한 금액의 약 7%인 5천358만6천931달러(약 690억원·달러당 1,288원 기준)와 지연이자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엘리엇과 정부 사이 분쟁의 시작은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다.
당시 삼성은 '경영상 필요'를 이유로 제일모직 주식 1주와 삼성물산 주식 약 3주를 바꾸는 조건의 합병을 결의하고 그해 7월 주주총회에서 최종 가결했다.
제일모직에 지나치게 유리한 합병비율이라는 논란 속에 삼성물산 대주주였던 국민연금(11.6%)이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설정된 이 비율에 찬성표를 던지며 성사됐다.
당시 국민연금은 제일모직의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가치를 근거로 합병 비율에 손을 들어줬다.
삼성물산 지분의 7.12%를 보유하고 있던 엘리엇은 합병 결의 발표 직후 반대 의사를 밝히고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삼성 계열사에 합병 반대 동참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는 한편 한국 법원에 주주총회 소집통지 및 결의 금지, 자사주 처분 금지 가처분 등을 제기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2015년 9월 '통합 삼성물산'이 출범하며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싶었으나, 양사 합병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국정농단 특별검사팀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와 지배권 강화 등 그룹 내 현안을 해결하는 데 박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뇌물을 건넸다는 의혹을 수사하면서다.
삼성전자 지분 4%를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이 전혀 없던 이 회장이 23.2%의 지분이 있는 제일모직과 합병, 이 회장의 삼성물산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늘리려 했다는 게 특검의 판단이었다.
특검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합병 찬성) 과정에 박근혜 정부가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며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당시 국민연금 기금운용공단 본부장 등을 기소했다.
문 전 장관과 홍 전 본부장은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해 4월 각각 징역 2년 6개월을 확정받았다.
법원은 이런 행위가 일어난 궁극적 배경에 박 전 대통의 지시나 승인이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경영권 승계 등 현안을 염두에 둔 부정한 청탁과 함께 뇌물을 건넨 혐의는 별도 기소돼 2021년 1월 징역 2년 6개월을 확정받았다.
국민연금의 결정에 박근혜 정부가 개입하게 된 출발점이 이 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최서원 씨 측에 건넨 뇌물 86억원이었다는 점이 법원에서 확인된 셈이다.
이날 PCA의 판단도 이런 국내 법원의 판결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삼성호암상 시상식 참석하는 이재용 회장 (서울=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1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2023년 삼성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2023.6.1 mon@yna.co.kr
이 회장은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이 대주주로 있던 제일모직 주가를 의도적으로 높이고 삼성물산 주가를 낮춰 안정적으로 통합 삼성물산 지분을 확보했다는 혐의로 2020년 9월 기소돼 현재까지 재판받고 있다.
법원은 최근 옛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이 합병 비율에 반대해 낸 가격 변경 신청 사건에서 5만7천234원이던 기존 보통주 매수가를 주당 6만6천602원으로 올리는 판결을 확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수사·재판 과정에서 당국자의 압력이 있었고 합병비율이 부당했다는 정황이 유력해지자 엘리엇은 2018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7억7천만 달러(약 1조원)의 배상을 요구해 이날 일부 승소 판정을 받아냈다.
엘리엇은 2018년 4월13일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중재의향서를 제출한 데 이어, 3개월 뒤 중재신청서를 제출했다.
PCA는 같은 해 11월 중재판정부를 구성하고 이듬해 4월부터 서면 심리에 돌입했다.
2021년 11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흘간 양측의 구술 심리를 열었다.
당시 엘리엇 측은 "정부의 불법적인 개입이 없었으면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 측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했을 수 있다는 취지로 반박했다.
중재재판부는 지난해 4∼5월 양측이 제출한 추가서면서까지 검토한 뒤 올해 3월 절차 종료를 선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