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세표준은 제대로 신고해 조세의 확정에는 지장을 초래하지 않았더라도, 처음부터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재산을 은닉하는 등 조세의 징수를 불가능하게 했다면 조세포탈죄가 성립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과세표준의 확정신고로 조세가 확정됐을 땐 ▲제2차 납세의무 ▲물적납세의무 ▲국세채권의 우선권 ▲체납처분절차 ▲사해행위 취소 등 조세채권의 만족을 위한 여러 가지 다른 장치가 따로 마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결정이어서 주목된다.
대법원은 6일 금괴판매사업자의 조세포탈행위에 따른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소송' 상고심과 관련 "서울고등법원이 재산을 빼돌린 채 과세표준을 신고한 경우, 조세포탈죄와 관련해 유죄에 해당된다고 선고한 것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대법원에 따르면 금괴사업자 A씨 등은 허위의 수출계약서를 작성해 외화획득용 원료구매승인서를 발급받아 영세율로 금괴를 구입하고서도, 이를 가공·수출하지 않은 채 구입 즉시 구입단가보다 낮은 가격에 국내 업체에 과세금으로 전량 판매했다.
A씨 등은 금괴의 판매단가를 공급가액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가산하는 방식으로 금괴의 판매단가를 받았으며, 단 3개월 동안만 금괴의 구입 및 판매영업을 한 다음 곧 폐업신고를 했다는 것.
특히 A씨 등은 금괴 판매대금이 판매법인 계좌로 입금될 때마다 곧바로 이를 전액 인출 법인 명의의 재산을 거의 남겨두지 않고, 일부 거래에 대해서만 세금계산서를 발행·교부해 과세표준 및 세액신고서를 제출했다.
결국 A씨 등은 당초 의도대로 1999년 1기분 부가가치세 63억2700여만원, 제2기분 5억3100여만원을 그 납기에 납부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판결문(2005도9546. 2007. 2.15)에서 "조세징수는 신고 또는 부과처분으로 조세채권이 확정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며 "사기 기타 부정한 행위로 조세의 확정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한 때는 조세징수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세포탈죄를 구성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특히 "비록 과세표준을 제대로 신고하는 등으로 조세의 확정에는 아무런 지장을 초래하지 않지만 조세포탈죄 기수시기에 조세징수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케 하고, 그것이 조세징수를 면할 목적의 사기 기타 부정행위로 생긴 결과라면 조세포탈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다만 "조세채권을 만족할 다른 수단이 있는 것을 감안 이 경우 조세포탈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그 행위의 동기 내지 목적 그리고 징수가 불가능한 이유와 경위 및 정도 등을 전체적·객관적·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확대해석은 경계했다.
과세표준의 신고가 조세를 납부할 의사는 전혀 없이 오로지 조세징수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의도로 사기 기타 부정행위를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형식적으로 이뤄져, 실질에 있어서 무신고와 다를 바 없는 경우이어야 조세포탈죄가 성립된다는 것.
대법원에 따르면 A씨와 같은 거래방식은 처음부터 세액의 납부를 전제로 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서, 거래상대방에게서 거래징수 한 뒤 폐업신고로 지급을 면하는 부가가치세 상당액이 유일한 이윤의 원천이자 거래의 동기였다.
일부 세금계산서를 끊어주고 부가가치세를 신고해 조세확정이 정상적으로 이뤄졌더라도 금괴를 매수한 사업자가 매입세액으로 공제를 받거나 환급, 오히려 국가로서는 조세수입의 감소나 국고손실을 초래했다는 것이 대법원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A씨 등의 부가가치세 신고는 사기 기타 부정한 행위를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형식적으로 신고한 것과 다를 바 없고, 국가가 세금을 거두지 못한 이상 이들의 행위는 조세포탈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
대법원은 이와 함께 A씨 등이 수출신고서를 작성해 외화획득용 원료구매승인서를 발급 받고 그 수입에 대응하는 외화획득을 하지 않았다는 대외무역법위반의 범죄사실과 관련해 이미 판결을 받았지만, 조세포탈죄는 별개의 행위로 별도 처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다만 "고등법원이 언제 조세포탈죄가 성립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기수시기'의 판단과 관련해선 법리오해가 있었다"며 "이 부분을 다시 심리·판단하기 위해 사건을 파기, 원심법원에 환송한다"고 판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