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 경신 행진을 멈춘 미국산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한때 배럴당 80달러를 넘었고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두바이유도 75달러 선을 위협할 태세다.
전문가들은 원유시장의 수급 불균형 때문에 유가의 오름세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고유가로 성장, 물가, 체감경기 등에서 부담을 받고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부실 여파 등 다른 대외여건도 악화돼 충격의 강도는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서민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이런 충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도록 기름값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유류세를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다시 나오고 있다.
◇급등세 오래가지 않겠지만 장기적 상승 추세
사상 최고가를 연이어 갈아치우던 국제유가가 급등세를 멈춘 것은 현재 유가수준이 너무 높다는 인식이 있는 가운데 허리케인 움베르토로 피해를 봤던 정유시설들의 가동 재개 소식 영향이 컸다.
또 허리케인 움베로트의 세력이 약화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 사무총장이 "세계금융시장 위기로 석유수요가 감소할 수 있는 만큼 배럴당 80달러라는 가격은 일시적"이라고 말하는 등 급등세가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관계자도 "추가 악재가 없는 한 급등세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유가의 근본 원인이 노후화된 정유시설로는 중국, 인도 등 개발도상국으로 인해 늘어난 석유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수급불균형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속도가 문제지, 유가의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여기에 미국의 원유 재고가 예상보다 적다는 점도 수급불안을 가중시키고 있고 국제 원유시장에 가세한 투기세력도 국제 유가 상승을 부채질 하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인 글로벌 인사이트는 4.4분기 중에 공급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고 있으며 로이터가 석유시장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상당수 전문가들이 내년까지 유가 상승세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와 민간기관 전문가들로 구성된 우리나라의 국제유가 전문가협의회도 두바이유 기준으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선 아래로 내려오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골드만삭스 등 국제투자은행들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90~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을 내 놓고 있다.
◇경기 회복세 발목 잡나
국제유가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경기 회복의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1% 상승하면 1년에 걸쳐 국내총생산(GDP)은 0.02% 정도 감소하고 물가는 0.02%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올해 국제유가(두바이유) 전망치를 배럴당 평균 58달러에서 62달러로 최근 올렸지만 현재 두바이유는 이보다 10달러 이상 높다.
물론 연간 평균 유가와 정부 전망치의 차이는 아직 크지 않지만 유가 상승세가 이어지면 두 지표 사이의 괴리가 늘어나 올해 성장률 예상치인 4.6%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고유가는 국내 물가 상승을 유발하고 국제유가가 많이 오르면 수입단가가 수출단가보다 더 크게 올라 교역조건을 악화시킬 수 있다. 실질소득과 구매력이 떨어져 체감경기도 악화된다는 의미다.
또 국제유가가 계속 상승하면 전 세계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글로벌 경기 침체를 불러 올 수도 있어 우리나라의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더구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여파가 장기간 지속될 수 있고 세계 경기 하강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어 국제유가 급등세 지속되면 갈길 바쁜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송태정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그동안 고유가의 충격을 원화 강세로 흡수해 왔는데 최근의 유가 상승이 원화 약세와 맞물린다면 파괴력이 클 것"이라며 "유가 급등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 가계 구매력 저하로 소비에 부정적이고 기업은 생산비용 상승으로 채산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곽수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유가 상승으로 경기 침체 속에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날 우려도 있다"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세계 경기 둔화 가능성, 환율, 금리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있어 이런 요인들이 한꺼번에 악화될 지, 아니면 순차적으로 해결될 지를 지켜보면서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영록 재정경제부 제2차관은 "현재 국제유가(두바이유)가 연간 평균으로는 정부 예상보다 1~2달러 정도 높아 비상대책을 강구할 단계는 아니다"며 "예의주시하면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유류세 인하 요구 다시 높아져
유가의 고공비행이 우려되면서 유류세를 내려 고유가의 충격을 흡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나오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휘발유 가격을 ℓ당 1천496.4원이라고 가정할 때 세전 가격은 616.07원에 불과하다. 나머지 880.33원은 세금이며 세목별로는 교통세 526원, 주행세 139.39원, 교육세 78.9원, 부가가치세 136.04원 등이다. 휘발유 가격의 58.8%가 세금인 셈이다.
정부는 이런 유류세가 다른 나라에 비해 높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OECD 회원국 중 일본(41%), 호주(38%), 캐나다(31%), 미국(14%) 등은 휘발유 가격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나라보다 낮다.
또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국민총소득(GNI)을 감안한 휘발유 세금 수준은 우리나라를 100으로 봤을 때 일본 23, 호주 19, 캐나다 15, 미국 4 등에 불과해 경제 수준을 감안해도 우리나라의 유류 관련 세금 비중은 다른 나라보다 매우 높은 수준이다.
정부는 이에 대해 유류세를 내리면 세수는 크게 줄어들지만 가격 인하 효과는 불확실하다며 유류세 인하에 난색을 표했고 최근에도 유류세를 인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올해 세수가 지난해 실적보다 20조원 이상 증가한 150조4천억원에 달하고 올해 예산에 비해서도 11조원(7.9%)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세수에 여유가 있는 만큼 유류세를 내려 고유가에 따른 서민이나 영세 자영자들의 충격을 줄여줘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 관계자는 "올해 세수 호조는 일시적일 수 있지만 세금은 한번 내리면 다시 올리기 힘들다"며 유류세 인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