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건설업체들의 입찰담합 혐의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상 처음으로 공정거래위원회가 보유한 업체들의 자진신고 자료를 압수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전속고발권을 갖고 있는 공정위는 자진신고 감면제도와 비밀 유지 규정에 따라 해당 업체를 고발하지 않고 검찰에 대한 자료 제출도 거부했으나 검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동원해 자료를 강제로 압수했다.
이에 대해 기업들은 "비밀유지와 제재감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누가 담합했다는 사실을 자수하겠냐"며 반발하고 있어 담합 자진신고 업체에 관한 비밀유지 논란이 제기되면서 자진신고 위축으로 향후 담합 적발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또 검찰이 공정위를 압수수색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그동안 전속고발권이나 강제수사권, 동의명령제 도입 등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마찰을 빚어온 양측이 다시 해묵은 감정싸움을 벌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 사상 첫 공정위 압수수색
18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서울지하철 7호선 연장공사 입찰담합 의혹을 수사중인 검찰은 지난주 공정위를 방문해 영장을 제시하고 임의제출 형식으로 자료의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당시 공정위에 지하철 7호선 입찰담합 조사관련 서류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지난 7월 발표한 하수관거정비 BTL 사업 입찰담합 건에 대한 제반 자료를 요구했다.
공정위는 7월 대우건설과 SK건설 등 7개 대형건설업체가 환경부 추진 하수관거정비 BTL 민간투자사업과 남강댐상류 하수도시설공사 입찰에서 담합한 행위를 적발해 시정명령과 함께 모두 36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었다.
지하철 7호선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공정위가 건설사들을 검찰에 고발하고 관련 자료들도 넘겨주는 등 수사에 협조를 했지만, 하수관거정비 사업 입찰담합건은 적발업체중 일부가 담합사실을 자진신고해 과징금도 경감받고 검찰 고발도 면제됐다.
문제는 검찰이 요구한 자료에 하수관거정비 사업 관련 자진신고 관련 내용이 포함돼있다는 것.
공정위는 자진신고 비밀유지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공정거래법과 시행령 등에 따라 검찰에 관련 자료를 줄 수 없다며 제출을 거부했으나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강제로 관련 자료를 압수해간 것이다.
공정위가 제출을 거부한 자료를 얻기 위해 검찰이 공정위를 압수수색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우리는 공정거래법상 자진신고자에 대한 비밀을 유지할 의무가 있고 담합 조사와 적발을 위해서는 자진신고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자료제출을 거부했지만 검찰이 임의제출 형식으로 관련자료의 제출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 자수 이용한 담합적발 무시 수사논란
공정위와 재계 등에서는 검찰의 공정위 압수수색이 대형 담합사건의 물증 확보 등에 필수적인 자진신고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자진신고 감면제도(리니언시)는 담합에 가담한 업체가 공정위의 조사후 제재를 받을 것을 우려해 공정위에 담합사실을 자수하고 조사에 협조해 결정적인 물증을 제공하는 대신 제재를 감면받는 제도다.
담합 행위는 워낙 치밀하고 정교한 수법을 동원해 이뤄져 강제수사권이 없는 공정위로서는 적발이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재 감면이라는 '당근'을 줘서 자수를 유도하게 한다는 취지다.
공정위 관계자는 "자진신고제는 소송에서도 담합을 입증할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담합에 가담한 기업들이 서로 '배신'하게 함으로써 동업종의 기업간 유착을 막고 담합이 재발할 수 있는 구조 자체를 깨는데 더 큰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공정거래법과 시행령 등을 통해 가장 먼저 조사에 협조하는 자진신고자에게는 고발 면제와 함께 과징금을 100% 면제해주고 2번째 자진신고자에게는 과징금 30%를 감면해주고 있다. 오는 11월 시행될 예정인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에서는 2번째 신고자의 감면비율이 50%로 높아질 예정이다.
대신 자진신고자의 신원이나 내용 등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 해당 업계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비밀보호 의무가 강화됐다.
특히 최근에는 석유화학업체들의 담합을 비롯해 합성고무, 하수관거 정비사업 입찰담합, 설탕가격 담합 등에 가담했던 업체들이 속속 자진신고 대열에 참여하는 등 자진신고가 늘고 있는 추세다.
◇ 재계 "앞으로 담합 자진신고 없을것"
재계는 공정위가 제재를 감면하고 비밀을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담합 가담 사실을 자진신고해왔으나 관련 정보가 검찰에 넘겨진다면 누가 자진신고를 하겠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검찰이 공정위 압수수색을 통해 자진신고 관련 정보를 가져가면 제재 감면이나 비밀이 보장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이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관계자는 "관련 부처의 행정지도에 따른 가격인상도 담합으로 처벌받는 등 그동안 공정위의 담합 적발에 논란이 많았는데 이제 자진신고 관련 비밀도 보장되지 않는다면 자진신고를 할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의 자진신고가 위축되면 공정위가 담합조사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일부 혐의를 적발하더라도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행정소송에서 패소하는 사례도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사생활 보호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공정위가 자료 제출 여부를 놓고 고심 한다고 해서 영장을 제시했다"면서 "우리가 조사하는 입찰담합 사건에 참고하기 위해 자료를 받아온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