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랠리가 시작된 2∼3년 전만 해도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까지 갈 수 있다는 일각의 전망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전 세계는 이에 대비한 구체적 대응 계획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기름 한 방울 나지않는 우리나라로서는 대책이 막연하긴 하지만 국민 부담을 덜기위해 지나치게 높은 유류세 인하 등 충격 완화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WTI 90달러-두바이유 80달러 '기정사실화'
19일 국제 석유시장에서 국제 유가 향방의 척도인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선물 가격(11월 인도분)이 88.60달러로 전날보다 0.87달러 하락했다.
하지만 이는 장 후반의 조정이었을 뿐, 장중에는 90.07달러까지 치솟으며 사상 처음으로 유가가 배럴당 90달러선을 넘을 수 있음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중동산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전날보다 배럴당 1.39달러 뛰어 사상 최고가인 79.59달러를 기록, 배럴당 80달러 고지를 눈앞에 두게 됐다.
유가 충격은 주식시장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날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고유가와 기업 실적 우려가 겹치며 전날보다 366.94포인트(2.64%) 하락한 13,522.02에 거래를 마쳐 '서브프라임' 충격이 시장을 뒤덮었던 지난 8월9일 이후 최대 낙폭을 보였다.
영국 런던증시의 FTSE100지수도 81.50포인트(1.23%) 하락한 6,527.90을 기록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증시의 DAX지수(-0.47%), 프랑스 파리증시의 CAC40지수(-0.46%) 모두 일제히 약세를 면치 못했다.
◇ 정부, 무대책이 대책
1980년 2차 오일쇼크 이후 최대의 유가 충격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직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무렵만 해도 두바이유가 배럴당 32달러를 넘으면 가격대에 따라 유류제품에 붙은 세금을 깎아 충격을 흡수한다는 방침이었지만 이후에는 공급 차질없이 가격만 오를 경우 시장에 반영하겠다는 쪽으로 방침을 선회,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제는 이런 지침을 그대로 유지해도 상관없을 만큼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산유국인 카타르의 압둘라 빈 하마드 알-아티야 석유장관은 최근 알-자지라 방송에 출연해 "1972년부터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공정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가 넘어야 한다"고 엄포를 놨다. 알-아티야 장관뿐 아니라 서방 분석기관을 중심으로 내년에는 유가 100달러 시대가 열리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시장이 버틸 수 있는 한계에 거의 다다른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16일 현재의 유가수준이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1981년 3월 기록한 84.73달러(당시 가격 37.48달러를 현재 가치로 조정한 가격)의 역대 최고치를 넘어선다고 진단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국민이 유류 소비를 줄여야한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17일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영주 산자부 장관은 유류세 인하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의원들에게 "유가가 너무 오르면 세계 경제가 후퇴하고 수요가 줄어 무한정 올라가지 않는다"며 낙관론을 펼쳤다.
◇ 대권 후보 "과도한 세부담 완화" 한목소리
정부는 유류세 인하론이 제기될 때마다 "손쉽게 거두기 위해 유류세를 부과하는 게 아니며 별 효과 없이 세수만 줄어든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가격의 변동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표적 유류제품인 휘발유의 가격은 세금이 60%에 가까워 마진을 합한 원가보다 세금이 더 많은 기형적 구조다.
국내 유가산정의 기준이자 세전 가격인 싱가포르 석유시장에서 휘발유 가격이 현재 배럴당 90달러이고, 이를 ℓ로 환산하면 0.56달러, 원화로 500원대 초반이란 점을 감안하면 국민이 얼마나 비싼 기름에 시달리고 있는 지 곧바로 알 수 있다.
정부는 지난해 원유 등의 수입관세나 각종 부과금을 빼고도 자그마치 23조5천억원이나 되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등 지난 5년간 103조8천억원의 유류세를 거둬들였다.
더구나 정부가 추계한 올해 총 세수가 예산보다 자그마치 11조원 가량 더 걷힐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유류세 인하 여력이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은 없다.
정부의 '옹고집'과 달리, 각 당의 대통령 후보 등 정치권은 유류세 인하에 적극적이다. 선거를 앞둔 탓이기도 하지만 각종 여건을 고려했을 때 어떤 형태로든 국민 부담을 덜어야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유류세의 10%,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20%의 인하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따라서 누가 정권을 잡든 유류세 인하는 기정사실화한 상태다.
정부 내에서조차 유류세 인하의 필요성을 시인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김영주 산자부 장관은 지난 17일 국정감사에서 유류세 인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산자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세율을 유지하는 것으로 예산이 짜여 있고 재정경제부 등이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비해 유류세 인하 거부를 주도해온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같은 날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이 유류세 인하를 촉구하고 나서자 "인하의 논리가 없다"는 '논리없는' 답변으로 버티기를 계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