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중국방문에 청와대와 여권이 허를 찔린 기색이 역력하다. 하필 이 시점에 중국방문이 이루어진 것을 놓고 남·북한 사이에서 중심(中心: 중국의 마음)이 오락가락한다는 비난도 꼬리를 문다.
지난달 30일 한 중 정상회담을 띄우던 청와대는 천안함 사고조사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방중을 허락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북한에 판을 깔아주기 위한 것 아니냐'며 노골적인 불만이다. 얼마 전 중국을 다녀 온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도 '실망이고 우려스럽다'고 자못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 여권이 곤혹스러울 만도 했다. 상하이에서 한·중 정상이 만난 지 사흘 후 김정일 위원장이 탄 특별열차가 압록강을 건너 단둥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청와대는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천안함 침몰로 사망한 장병과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애도를 표했으며, "한국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있는 것을 평가한다"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밝혔다고 전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소행으로 밝혀질 경우 중국이 국제사회의 공동대응에 동참하리라는 희망 섞인 관측까지 나왔다.
문제는 후진타오의 이런 '우호적' 발언이 중국 관영매체들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후진타오는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기에 앞서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 "중·북 친선관계를 고도로 중시하고 북한과의 선린우호관계를 끊임없이 공고· 발전시키는 것은 중국 당과 정부의 일관한 방침"임을 천명했다. 천안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수세로 몰리고 있는 북한에게 힘을 실어 주는듯한 발언이었다.
천안함사건을 바라보는 중국의 속마음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천안함 침몰로 나라가 슬픔에 빠지고, 북측이 남측의 금강산 관광에 셔터를 내렸던 지난달 24일 중국이 북한에 보내는 단체관광객을 실은 첫 열차가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고 한다.
"'항미원조'(抗美援朝: 한국전쟁) 때 죽은 15만 명 가량의 중국 인민지원군 유족들은 조선에 한 번은 가보려 한다"는 것이다. 4박5일에 한 사람당 5000위안(약 80만원)이 든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도 북한에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는 예상이다.
한국과 중국은 올해 교역규모가 2000억 달러에 달해 미국 및 일본과의 교역규모를 합친 것보다 더 클 정도로 경제적으로 밀착돼 있다. 그러나 '전략적 동반자관계'라는 수사(修辭)에도 불구하고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는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다.
북한문제에 지나치게 묶여 중국을 상대로 당당한 외교를 펼치지 못하고, 한국의 과공(過恭)과 중국의 비례(非禮)가 거듭돼 왔다. 우리 입장에서 대중국정책과 대북정책을 분리시키고 정치 경제 전반에 걸쳐 중국에 대한 대전략(Grand Design)이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한반도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미국과의 대결구도 상 '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의 존재는 중국의 핵심이익이다. 이 때문에 북한의 혼란이나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북한이 곧 망하리라는 바깥세계의 예상들은 중국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는 데서 힘을 얻는다. 북한 인구는 고작 2000만이다. 중국의 1개 도시 규모이고, 경제대국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제할 수 있다.
경제난으로 북한이 붕괴되는 것을 중국이 내버려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막히고 식량난 등으로 북한의 어려움이 가중될수록 중국의 영향력만 키워주는 결과가 된다는데 우리 측 대북압박의 딜레마가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이번 중국방문은 북한의 두 차례 핵실험 이후 당근과 채찍을 함께 집어든 중국이 북한과의 오랜 혈맹관계를 복원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중국은 북한 에너지 수입량의 90%, 소비재의 80%, 식량의 45%를 공급한다. 중국과 북한관계는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한동안 냉랭한 관계에 빠졌었고, 8년만인 2000년 3월 김정일이 평양주재 중국대사관을 전격 방문함으로써 관계재개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김정일은 네 차례 중국을 방문해 교류의 폭을 넓혀 왔다. 중국은 2003년에 시작된 6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북한은 두 차례 핵실험을 거듭해 중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은 유엔의 대북제재에 동참은 하면서도 북한에 대한 지원은 거두지 않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 화폐개혁실패가 상징하는 경제난국, 김정일의 건강악화, 그리고 김정은으로의 후계구도 안착 등이 맞물려 북·중 연대와 경제협력 강화를 국제사회에 과시할 필요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라진항 개방에 따른 중국과의 후속 투자 논의와 무상원조 및 위안화 차관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실리 챙기기' 행보가 예상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이 중국기업들의 대북진출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높고 중국인들의 금강산 관광길이 열릴 것이라는 전망들도 벌써부터 나돈다.
김정일의 '중국카드'가 긴장고조로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남북관계 열차'를 멈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소행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않는 한 유엔차원의 대북제재국면에서 중국의 지지를 얻기 어려우리라는 관측에 벌써부터 힘이 실리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 '천안함 국면'과 별개로 6자회담 재개노력을 하고, 미국이 그 흐름에 동참한다면 '천안함 국제공조'를 통한 대북압박은 '닭 좇던 개'가 되기 십상이다.
중국은 북한을 6자회담에 복귀시킴으로써 북한 경제지원의 명분을 얻고, 북한은 6자회담 복귀라는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경제협력 등 원하는 실리를 챙긴다면 이는 윈윈 게임이다.
천안함 사태 와중에 중국이 김 위원장의 방중을 받아준 것은 중국의 한국 무시 외교정책이 그대로 드러낸 단적인 증거이며, 대중 외교정책을 재점검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반면 김 위원장의 방중이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북핵폐기 프로세스, 남북관계를 위해 좋은 일이며, 한국도 차제에 대북대화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하는 주장도 있다.
북한이 급변사태로 통제 불능상태가 되면 중국이 군사적 개입에 나설 것이며,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에서 충돌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나도는 상황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방치한 채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키려는 전략은 너무도 단선(單線)적이다.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우리의 영향력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미치지만 북·중관계가 밀착되면 중국의 영향력이 한강까지 밀고 내려온다는 얘기가 새삼 실감나는 요즘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