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로 그 위험성이 드러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은행대형화 논의가 금융계의 뜨거운 화두(話頭)로 다시 떠올랐다. 'MB맨'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장이 국내 최대금융그룹 KB금융 회장으로 내정되면서부터다.
어 내정자는 "국외에서 원전을 수주할 때 우리나라 은행들은 보증을 설 수 없다. 보증을 설 수 있는 세계 50위권에 드는 국내은행이 있어야 한다"며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우리금융과 산은지주에 관심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러잖아도 금융가는 우리금융과 산은지주의 민영화, 외환은행 매각과 맞물려 인수·합병을 통한 이런저런 짝짓기논의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메가뱅크(Megabanks: 초대형은행)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추진한 주요정책의 하나였다.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어 통제가 가능했던 산업은행, 우리금융, 기업은행을 합쳐 글로벌경쟁력을 갖춘 초대형은행을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그해 9월 미국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금융위기로 쑥 들어갔었다. 그러다 지난해 연말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발전소건설 수주를 계기로 되살아났다.
UAE정부가 세계 50위권 이내 은행의 공사지급보증서를 요구해왔고, 이 기준에 맞는 국내은행이 없어 막대한 보증료수입을 두 눈 뜨고 외국은행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실제 한전 컨소시움이 수주한 금액 186억 달러 가운데 절반인 93억 달러는 정부가 대주단을 통해 차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국내은행들은 이 프로젝트가 60년에 걸쳐 진행되는 장기프로젝트인데다, 한전이나 국내은행들의 신용등급이 낮아 고리로 자금을 조달해야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낮아 참여를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수 합병을 통해 메가뱅크를 만들라는 'MB특명'이 떨어졌다는 얘기들이 나돌고, 그 뜻을 충실하게 받들 MB맨이 KB금융회장에 포진됨으로써 은행대형화에 막강한 힘이 실리게 됐다.
우리 경제규모에 비해 국내 은행규모가 영세한 것은 사실이다. 2008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5위지만 은행은 총자산기준 세계 1000대은행중 우리금융이 81위, 국민은행 87위, 신한은행이 89위에 불과하다.
그나마 우리금융의 총자산규모는 1위 은행의 6.6%, 10위은행의 12.2%, 50위은행의 절반정도다. 은행규모가 작아 국내시장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국제경쟁력도 형편없다.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경쟁하려면 먼저 덩치부터 키워야한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온다.
KB금융과 우리금융이 합친다면 자산규모는 650조원으로 단숨에 세계 50위권 내로 진입한다. 그러나 전문성과 핵심역량은 도외시한 채 엇비슷한 은행을 합쳐 덩치만 키운다고 국제경쟁력이 생겨나지 않는다.
성급한 메가뱅크화는 규모의 경제를 발휘하기는커녕 부실덩어리를 키워 국가경제에 더 큰 부담을 안긴다는 경계론이 현실적으로 우세하다.
은행은 규모가 능사가 아니다. 초대형은행과 국내외 경쟁력은 별개다.
1980년대 세계 최대 은행 빅10 가운데 8개가 일본은행들이었다. 근년 들어 중국은행들이 빅10의 상위랭킹에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화로 자산규모나 주식시가총액은 커졌지만 그에 상응하는 전문성이나 글로벌경쟁력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은 지금도 '금융후진국'에 속한다.
은행덩치가 커질수록 경제전체가 연쇄적으로 부실화되는 시스템리스크는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다. 초대형은행이 부실화되면 전체금융시장과 나라경제가 휘청거리게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 살아있는 교훈이다.
대형화가 활발한 미국과 영국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데 비해 그렇지 못한 캐나다가 상대적으로 안정됐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캐나다의 최대은행은 미국최대은행 규모의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초대형은행은 우선 세계적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미국은 은행들이 금융시스템을 위협하지못하도록 규모의 대형화를 규제하는 방안을 추진중이고, 이것을 G20의 의제로 삼아 다른 나라에도 확대적용을 시도하고 있다.
글로벌경쟁력과 사업다각화를 통한 위험분산은 초대형은행의 검증되지 않은 신화(myth)며, 메가뱅크 '쪼개기'(breaking up)가 '대마불사'에 대한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금융회사의 투자제한과 대형화 억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볼커룰'은 부채기준 시장점유율이 10%를 넘는 금융회사에 대해 인수합병이나 추가지분인수를 못하도록 막고 있다.
2009년 현재 KB국민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 3개사가 모두 10%를 넘기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따라서 '볼커룰'이 국내에 적용된다면 덩치 키우기는 제약을 받게 된다.
금융산업 규제보다는 성장이 아직은 우리의 갈 길이라고는 하지만 올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규제안을 조율하고 성사시킬 책임이 있는 의장국인 한국이 이를 외면하면서 메가뱅크를 밀어붙일 수 있을지도 큰 주목거리다.
KB금융과 우리금융과의 합병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벌써부터 만만치 않다. 업무영역이 내부적으로 중복되는 부분이 많고, 해외시장에서의 전문성과 업무의 국제화, 인력과 경영능력 경험 등이 똑같이 부족해 자칫 대형 부실은행을 결과할 우려도 적지 않다는 지적들이 제기된다. 핵심기술과 축적된 역량, 글로벌경쟁력의 삼박자가 어우러져야 '금융의 삼성전자'도 가능하다.
메가뱅크의 성공 여부는 개연적인 반면 그 부담은 필연적이다. 시스템리스크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는 것은 물론 시장지배력을 확대한 메가뱅크가 국내시장 위주로 안주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새로운 수익원 확보가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글로벌화를 미적거릴 수도 있다.
대형화과정에서의 관치(官治)도 불확실성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리스크다. KB금융은 정부지분이 없고 국내외 기관과 개인투자자들이 조금씩 나눠 갖고 있는 순수민간회사다.
7개월 전 선출된 회장내정자가 외압을 받아 물러난 자리에 청와대가 후임자를 낙점했다. 정치권력이 교체되면 누군가로 다시 바뀔 수도 있다는 점에서 '외풍 리스크'다. 회장 내정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외국인들이 KB금융주식을 내다 판 시장의 경계가 이를 예고한다.
원전수주에 따른 지급보증은 여러 은행들이 공동으로 대응하면 된다.
우리금융의 정부 지분 인수를 놓고 '낙점을 받기위한 파워게임'이 'MB맨' 간에 치열해지고, '가격보다 정치적 판단이 더 큰 변수'가 되는 상황이 관치의 부활을 실감케 한다.
시장의 힘이 아닌, 권력의 개입을 통한 메가뱅크 밀어붙이기는 더더구나 위험한 실험이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