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 '중원싸움'이 치열하다.
2012년 대선과 총선에서 중도층 표심을 잡기위해 여야가 다투어 좌측으로 방향을 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당 강령에서 '중도개혁주의'를 빼고 '진보'를 전면에 내세우며 왼쪽으로 더 나아갔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한나라당을 개혁적 중도보수정당으로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좌와 우의 중간에 있는 중도층을 잡으려면 '좌회전'이 불가피하다. '한나라당=보수'라는 틀을 깨면서 '중원'을 장악하겠다는 출사표다.
안 대표는 서민과 중산층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복지강화를 시급한 과제로 내걸었다.
당 서민정책특위 홍준표 위원장은 "다소 성장이 더디더라도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고 뒷받침했다. 평소 '야당 몫'으로 불릴 정도의 서민정책을 '부자정당' 한나라당이 넘보게 된 것이다.
한나라당의 '좌회전 깜빡이'는 당의 정체성 위기를 넘어 한국보수의 위기와 직결된다.
최근 한나라당 내부의 한 여론조사결과가 이를 웅변한다. 이명박 정부의 재집권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61.6%가 "다른 정당으로 바뀌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고 한다.
정권교체에 대한 선호는 보수 전반의 지지층 이탈 때문이라고 한다. 보수정치에 대한 지지도 조사에서 보수 이탈층 13.9%, 절대 반대층 56.9% 등 70.8%가 보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보수지지에서 이탈한 이유로 '기대한 만큼 경제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 32.1%, '재벌 등 가진 자만을 위하기 때문'이 20.7%,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 17.9%, '부패하기 때문'이 16.4% 순서였다.
3년 전 이명박 정부의 탄생은 한국 보수에게는 일대 축복이었다. 이명박 후보의 득표율이 48.67%나 된데다 이회창 후보의 것을 포함해 보수의 득표율이 63.75%에 달했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보수지지로 돌아섰던 유권자들이 3년 만에 보수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승리에 도취된 한국의 보수와 이명박 정부의 자업자득 탓이다.
10년만의 정권교체였지만 투표율 63%를 감안하면 이명박 후보의 절대득표율은 30.52%였다.
전체유권자의 30% 남짓한 지지로 당선됐을 뿐이고 보수전체로도 40% 정도의 지지율이었다. 노태우(32.96%) 김영삼(34.79%) 김대중(31.98%) 노무현(34.33%)보다 낮은 수치다.
게다가 이명박 후보는 자신에 대한 지지표와 박근혜에 대한 지지표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반발표를 합쳐 승리했다.
승리에 자만하기보다는 당선이후 경쟁자를 끌어안는 모습부터 보였어야했다. 임기절반이 넘도록 그런 정치적 포용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한나라당마저 내적 결속력 약화로 거대여당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초했다.
오늘의 위기를 불러온 더 큰 이유는 한국 보수 전체의 준비결여와 능력부족에 있다. 권력되찾기에만 급급했지 집권 후를 대비하는 체계적 프로그램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이명박 개인의 성공신화에 기댄 경제 살리기 구호는 노무현 정권의 경제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시적으로 표를 동원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민을 감동시키는 새로운 가치는 아니었다.
국민들의 열망을 다듬어 한 단계 높은 가치로 이끄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중도실용'이라는 어정쩡한 절충과 편의주의에 빠져 스스로 정체성을 의심받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사회의 다원화, 시민사회의 성장, 새로운 안보환경,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욕구 등 한국사회가 새롭게 맞이하는 시대환경에 대비한 청사진, 즉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나라당 내부 토론회의 한 지적(명지대 김형준 교수)이 이를 뒷받침한다.
시장개입에 대한 보다 분명하고 유연한 보수주의 원칙을 정립하고, 세계질서와 동아시아 국제관계,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한 독자적인 그림을 갖고, 미국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비전을 지닌 보수가 되어야 했었다.
우리나라 유권자는 반작용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보수가 집권하면 진보성향으로, 진보가 집권하면 보수성향으로 변한다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 집권후반기에 들면서 자신의 성향을 진보라고 대답하는 유권자가 많아지는 등 중도계층의 진보화경향도 두드러지고 있다.
보수의 위기가 반드시 진보의 기회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위기감은 여당 쪽이 더 한 것 같다.
"재집권하려면 중도로 갈 수 밖에 없다"며 '부자감세' 철회와 '골목상권' 보호, 중소기업과의 상생방안 등을 놓고 내홍을 겪고 있는 한나라당 집안사정이 이를 방증한다.
'중원싸움'의 전선은 복지문제다.
민주당이 소득이나 자산에 관계없이 국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데 대해 한나라당은 '소득 7분위(70%)까지 한데 아우르는 이른바 '70% 복지론'으로 차별화를 시도한다.
부자감세 철회를 통한 '친 기업' '부자정당' 이미지 탈피에도 안간힘을 쏟고 있다.
당 지도부가 부자감세 철회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한 불과 몇 시간 만에 청와대측 말 한마디로 뒤집어진 사실을 두고 '개혁적 중도보수는 말 뿐'이라는 자탄이 당 안팎에서 쏟아지는 판이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은 국민들이 보수적 가치를 선택했다기보다는 실패한 집권세력에 대한 응징과 이해관계의 부합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강하다.
한나라당과 대기업집단이 보수의 새 주도세력으로 나섰지만 이 두 축이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데 한국보수의 비극이 있다.
이념으로 윽박지르는 보수가 아니고 한반도 문제에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가진 보수, 복지와 분배문제에서 효과적이고 신뢰가 가는 대안을 제시하는 보수, 시장의 자율성과 역동성을 중시하면서도 시장공정성 등 시장의 기본인프라를 확고하게 다지는 보수여야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데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바야흐로 정치는 성과나 실적주의에서 '진정성의 정치' 시대로 옮아가고 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상극이 아니고 서로의 장점을 취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현실의 정치다.
그러나 이념에 관한 한 우리사회는 균형보다는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닫는 성향이 있다. 조선은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었고, 북한은 러시아보다 훨씬 더 공산주의적이며, 한국은 미국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글로벌화에 더 극성이라는 지적은 되새겨볼 만하다.
'좌빨' 과 '수구꼴통'의 양극단으로 치닫는 극한풍토에서 진정한 보수도, 진정한 진보도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