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자 발표일 새벽에 잠을 설쳤어요. 깨어보니 비도 오고있었고, 월드컵 축구 최종 예선인 이란과의 경기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이 안타깝게 패하는 것을 보고 예감이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합격, 그것도 수석합격이라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북인천세무서에 큰 경사가 났다. 평소 조용하고 일만 하는 줄 알았던 조사과 이인철(47세) 팀장(6급)이 올해 치러진 제49회 세무사 2차 시험에서 654명의 합격자 가운데 당당히 '수석(首席) 합격'이라는 영광을 안았기 때문이다.
엄연한 직장인이 세무사 자격시험 합격 그것도 수석합격을 하려면 본연의 업무는 물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러나 주변의 평가는 달랐다.
손황모 서장은 이인철 팀장을 "일도 깔끔하고 야무지게 잘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맡기면 안심이 되는 직원"이라며, "이 팀장은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최고의 인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동료 직원들도 자기 일처럼 자랑했다. 조사 2반장 이광용 조사관은 "직원들에게 일 처리하는 면에서 모범적이고, 수험기간 동안에도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일은 일, 공부는 공부' 공사를 확실하게 구분해 한다"면서 "그런 면이 닮고 싶은 좋은 형이자, 선배"라고 기뻐했다.
■ 오해가 불러온 시험 도전…시행착오 끝에 '결국'
이 팀장이 세무사 자격시험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다소 의외였다. 그는 시험에 도전하게 된 동기에 대해 "운명적(?)인지도 모르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 7∼8년 전쯤에 현직에 있으면서 세무사 시험에 합격한 동명이인이 있었는데, 지인들이 시험도 보지 않은 내가 합격한 줄 알고 축하 전화를 해 와 곤혹스러웠다"며 "아마 그 때쯤 나도 한번 시험에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2010년 제47회 수석 합격한 신상수氏가 같은 고향, 직장, 대학 선배"라며, "그 때 조세일보에 나온 합격수기를 읽었는데, 자기가 직접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 수험생활을 할 때는 한 1년쯤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며 "고등학교 이후 26년만에 다시 시작한 공부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그 때 조금씩 봤던 것이 쌓여서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소개했다.
또 "수험기간 동안 가족들의 위로가 물론 힘이 되지만, 수험생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는 것 같다"며, "동병상련이라고 진짜 고민이 있어 하소연 할 곳이 없을 때 고민을 들어주며 같이 수험생활을 한 동료들이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험기간 동안 가정 대소사와 직장의 회식, 취미활동, 경조사 등 자기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해 소홀했던 점이 힘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 군대 있는 아들, 고2 딸에 자랑스러워…아내에겐 '고마움'
이 팀장은 합격소감에 대해 "아들이 군대 말년 병장인데 아빠의 수석합격 소식을 듣고 부대 홈페이지에 올렸다더라"며 "부대 관계자들이 좋아하더라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합격이 실감이 났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또 "평소 말이 없는 편인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이 '친구들에게 아빠 얘기를 했더니 너희 아빠 대단하다며 야단법석이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더라"며 "그 때 그 동안의 고생이 잊혀질 만큼 뿌듯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가장 기뻐하지 않았겠냐"며 "지난 4년여의 수험기간 동안 사소한 골칫거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해결해 잡념 없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게 해준 것에 정말 고맙다"고 했다.
■ 수석여부는 '백지장 차이'…"시험은 절실한 순서대로 합격"
이 팀장은 수석합격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해선 "실력이야 백지장 차이 아니겠어요, 다만 그 날 운이 좋아 순서가 바뀐 것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곧이어 이 팀장은 자기 책상 서랍 한쪽에서 꼼꼼히 적은 두꺼운 메모장을 가져왔다. 암기가 필요하지만 기본서를 다시 보기엔 시간이 많이 걸려서 출퇴근 때 전철을 오가며 봤다는 메모장이었다.
이 팀장은 합격을 위해서는 "암기력, 이해력, 문제풀이력 이 세 가지가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내 경험상 암기가 필요한 부분을 메모장에 기록했다가 자꾸 확인한 것이 실수를 줄여 합격한 것 같다"며 "실수를 줄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의고사를 통해 실수를 줄이는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모의고사 보러 갈 때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2시간씩이나 걸리는 거리가 부담스러웠다"며 "그 때마다 세무사 시험 준비 카페에서 보았던 '시험은 절실한 순서대로 합격한다'는 글을 떠올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절실함을 느끼며 일과 수험생활을 병행했었는데 "올해 4월 서장님, 과장님께서 6주나 되는 '회계학 연구'라는 국세청 교육과정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며 "그 때의 공부가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 고마움과 미안함 교차하는 동료…"쏘주 한 잔 OK?"
이 팀장은 세무사 수험생활을 함께 했던 직장 동료들에 대해선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듯 했다.
직장생활과 수험생활의 병행으로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을 때 그를 지탱해주며 버팀목이 된 부분에 대해선 고마운 마음을, 다같이 합격하지 못한 부분에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그는 "인천대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이 정말 고맙다"며 "한편으로 마음이 무겁다. 어려운 상황에서 같이 공부했는데 저만 합격 돼 안타깝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고양세무서에 근무하고 있는 신연희 조사관과 남인천세무서 안형선 조사관이 함께 근무했을 때 업무 처리를 잘 해줘서 일 처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동료들의 든든한 후원에 감사해 했다.
그는 특히 "수험생활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면서 수다 떠는 것"이라며, "앞으로 1∼2주 동안 술 약속만 줄줄이 잡혀 있다"며 싫지 않은 표정으로 즐거운(?) 엄살을 떨었다.
이 팀장은 앞으로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아직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그 동안 소홀했던 지인과 동료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