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채 오기도 전에 전력대란 우려가 먼저 닥쳐왔다. 가뜩이나 전력공급이 빠듯한 마당에 위조부품이 들어간 원전들이 잇따라 가동을 멈추면서 올 여름 최악의 전력난이 이미 예고된 상태다.
시험성적서가 위조된 제어케이블이 설치된 것으로 드러난 신고리 2호기와 신월성 1호기가 5월29일부터 가동을 중단하면서 각 100만kw씩 200만kw의 전력공급이 단숨에 줄어들었다.
오는 8일에는 월성 3호기(설비용량 70만㎾)가 계획예방정비에 돌입하는 등 국내 원전 23기 가운데 11기가 정비 및 위조부품 교체로 한동안 멈춰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올해 전력예비율이 안정선인 10%를 밑돈 날은 벌써 55일이나 된다. 사흘에 한 번 꼴이다.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여름철에 전력공급을 극대화해야 할 원전당국이 위조부품 때문에 원전가동을 멈추는 것은 그야말로 '천인공노' 할 일이다.
전력수급경보는 예비전력이 400만㎾ 미만이면 '관심', 300만㎾ 아래로 떨어지면 '주의', 200만㎾ 미만일 땐 '경계', 100만㎾ 아래면 '심각'으로 발령된다. 올해는 5월 23일 오후 5시 25분에 이어 지난 3일 오후 1시31분 순간 예비전력이 450만㎾ 미만으로 떨어져 전력수급경보 '준비'가 발령됐었다.
전력당국은 이달 둘째 주 예비율이 급격히 떨어질 것으로 보고 서둘러 여름철 수급대책을 내놓았지만 전력수급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 가시지 않고 있다. 전력공급 확대대책은 불확실성이 크고, 수요 감축대책은 낙관적 전망에 근거해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7월과 8월초 재가동을 추진 중인 한빛(영광)3호기와 한울(울진)4호기의 경우 지역주민들의 협조와 원자력안전위원회 승인을 얻어야하기 때문에 제 때 재가동한다는 보장이 없다.
또 7월말 준공예정인 화력발전기(100만kW)와 오는 9월 1차 준공예정인 세종열병합(34만kW)발전기의 일정을 앞당겨 한 달 전부터 시운전 출력을 활용하는 데도 무리수가 따를 수 있다.
수요감축 대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5000kw이상 전력다소비업체의 경우 8월중 (5〜30일)부하변동률에 따라 3〜15% 강제절전을 한다고 발표하자 "공장을 세우라는 거냐"며 기업들이 반발하고 있다. 산업체에 대한 강제절전은 생산차질을 통해 산업 및 국가경쟁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불러온다.
전력수급 불안보다 더 심각한 것은 원전의 안전문제다.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이용률은 사상 처음으로 80%이하로 추락했다.
2000년대 90%이상의 고공행진을 지속했던 원전 이용률은 고장이 잦았던 지난해 82%로 추락한 데 이어 올해 1∼4월 이용률은 79.16%로 더 떨어졌다. 1978년 고리 1호기가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한 이래 원전 이용률이 80% 밑으로 떨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이 같은 원전이용률은 세계평균이용률과 비교하면 나쁘지만은 않다. 원전은 현재 31개국에 총 437기가 운전 중이고 평균 이용률은 78.95%(2011년 상반기)다.
한국은 그동안 무사고에 높은 이용률을 자랑하며 '원전안전국'의 명성을 쌓았고, 원전수출국가로 발돋움했지만 근년 들어 잦은 사고와 비리로 원전 '보통국가'로 주저앉은 것이다.
위조부품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도 이미 여러 개 원전에서 비슷한 문제가 드러났지만 당국이 비리를 적발하고도 후속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시험성적서가 위조된 것으로 드러난 제어케이블은 원전의 '신경계'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이다. 자칫 대형 원전사고를 초래할 수 있는 불량 케이블이 이미 가동 중인 원전은 물론 건설 중인 원전에까지 사용된 것이다. 그나마 내부제보가 없었다면 이런 충격적인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원전 부품의 성능을 조사하는 검증기관들에 대한 견제장치가 사실상 없다는 얘기다.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소수 납품업체와 부품 검증업체가 끼리끼리 봐는 '비리커넥션'이 부실을 키웠다. 1979년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로 미국이 신규원전건설을 전면 중단하면서 미국 부품업체들이 문을 닫았고, 국내 원전에 사용될 부품은 서둘러 국산화됐다.
원전 1기에 들어가는 부품만 300만개인 이 노다지시장에서 함량 미달 업체라도 일정한 진입 장벽만 통과하면 탄탄대로를 달렸고, 서로 간 담합에다 부실부품마저 눈감아주는 문화가 고착된 것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관리책임자인 한국수력원자력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무능도 한 몫 했다.
시험·검증기관이 시험서 조작을 감행한 것은 사고가 나지 않는 평상시에는 제어케이블 이상으로 인한 문제점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맹점을 노렸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원자로계통에 구멍이 생기거나 금이 가 물이 새고 고온·고압의 극한상황에 도달할 경우 제어케이블이 특정한 동작 명령을 전달해 차폐문을 닫거나 반대로 구멍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냉각재 투입을 지시하게 된다고 한다.
신고리 원전 1∼4호기 등에 '먹통 케이블'이 쓰인 게 사실이라면 100∼200도의 고온이나 2∼3기압의 고압상태에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식이라면 대형 원전사고는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관련회사와 책임자 몇 명 고발 처리로 끝날 일이 아니라 검증기관이 서류를 조작해도 속수무책인 안전시스템 자체를 근본적으로 수술해야한다.
조작에 연루된 신고리 3·4호기는 아랍에미레이트(UAE)에 수출한 원전과 같은 APR 1400모델이다. UAE에는 국산이 아닌 외국산 케이블이 들어가기 때문에 UAE 수출과는 무관하다고 당국은 선을 긋고 있지만 원전수출에 악영향은 불가피해 보인다.
전력부족은 동·하절기만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수요변화에 적기 대응하지 못한 공급부족이 빚은 구조적 문제다. 기후변화와 산업구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전력사용패턴이 바뀌고, 산업구조고도화로 서비스산업이 확대되면서 상업용 수요도 급증하는 추세다.
안정적 수요관리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대형 전력수요 등 수요예측을 정교하게 해 이에 맞게 중장기 수급계획을 다시 짜야한다.
전력불안에 따른 국민생활 불편과 국가 경제적 손실도 문제지만 고질적 원전비리는 국민의 생명과 국가안전을 바로 위협한다는 점에서 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올여름은 이래저래 무덥고 길고 짜증나는 여름이 될 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