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K-IFRS 시가평가제, 자산 부풀리기·세금회피 조장

기업의 자산과 부채를 현실적으로 평가해 재무제표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도입한 K-IFRS가 준비부족과 제도상의 허점으로 오히려 회계정보를 왜곡해 재무제표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K-IFRS는 시가주의를 채택해 자산과 부채의 가치를 평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이 관련 회계기준을 적용할 때 시가평가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일 정도로 선택권한을 많이 주고 있어 문제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이러한 자율성을 악용해 기업실적을 부풀리거나 세금을 회피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 평가 여부•방법•시기 회사가 임의 선택...규정 왜 만들었나

K-IFRS는 시가주의를 채택해 자산과 부채를 ‘공정가치’로 평가하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매각자산, 퇴직금, 사업결합자산 등 일부 의무사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자산과 부채를 공정가치로 평가할지 말지를 기업이 선택하게 돼있다는 데 있다.

K-IFRS에서는 자산가액을 측정하는데 원가모형을 채택해 취득원가로 표시할지 재평가모델을 채택해 시가로 반영할지를 기업이 정할 수 있게 규정했다. 즉, 의무사항이 아닌 선택사항인 것이다. 시가평가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조항인 셈이다.

게다가 회사의 임의선택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회사가 재평가모형을 선택했다고 해도 모든 자산을 매년 재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자산 가운데 어떤 것을 골라 재평가할지, 또 언제할지도 기업이 선택할 수 있게 돼있다.

이때문에 같은 회사의 자산이라도 어떤 것은 시가로 표시되고 어떤 것은 취득가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부에 적힌 금액이 작년의 시가인지 올해의 시가인지도 알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K-IFRS 기준에는 단지 “중요한 변동이 있는 경우에 재평가를 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변동’의 판단 권한이 기업에 있다. 이 때문에 기업이 필요에 따라 임의로 재무상태를 조정할 수 있는 길이 합법적으로 열려있는 셈이다. 

K-IFRS 공정가치 평가대상 및 평가방법

                                                                            자료 : 금융감독원

■ 애매모호한 ‘공정가치’... 합법적 자산부풀리기·세금회피 길 열려

투자자와 금융기관, 인허가 관청, 거래업체 등 기업이해관계자들은 기업이 공시한 재무제표를 바탕으로 투자 또는 거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기업이 발표하는 재무제표의 자산과 부채 금액이 시가인지 원가인지 알 수 없다면 정확한 분석과 평가는 불가능하게 된다.

과거 원가주의를 채택했을 때는 시장성이 강한 부동산과 같은 자산은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별도 평가를 해 판단했다.

그리고 어느 업종 어느 기업이든 모두가 같은 기준에 의해 자산과 실적을 표시하기 때문에 회사간, 업종간 비교를 통해 해당 회사의 시장내 지위를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K-IFRS 도입 이후에는 그런 평가와 비교가 힘들어졌다.

K-IFRS가 주문하는 ‘공정가치’ 즉, 공정한 시장가격이란 무엇일까? 기업 회계담당자나 회계전문가들은 ‘공정가치’란게 말은 그럴 듯 하지만 막상 실무에서 공정가치를 산출해 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예를 들어 국가간 조세를 다루는 국제조세에서는 회사들이 가격을 나라에 따라 조작해 이익을 옮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상가격’이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즉 공정한 시장가격을 산정해 그것을 기준으로 회사간의 가격과 이익을 계산해 보자는 것이다.

정상가격 개념이 제기된 1970년대부터 OECD 등 국제기구가 주도해 수십년동안 세계석학들과 회계전문가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결국 수백쪽의 권고안을 만들었을 뿐 의무규정에 합의하지 못했다.

이문제로 국내기업들도 미국 국세청 IRS와 자주 소송을 벌이는데 소송이 걸렸다 하면 몇 년 씩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론적으로 그럴듯한 ‘공정한 시장가치’를 현실적으로 찾아내는게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자산재평가법’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폐지된 이 제도에서도 자산재평가를 통한 기업들의 임의적인 장부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재평가를 할 수 있는 기준을 엄격히 제한했다. 어느 기업이든 단 1회에 한해 자산을 재평가 할 수 있게 했다.

경영위험이 있거나 재무상태가 극히 악화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취득원가로 장부에 기재하고 평가가 필요한 경우 필요한 자산을 따로 평가했다.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 자산에 대한 재평가를 이제는 기업들이 언제고 임의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업규모를 크게 불리고 싶을 때나 반대로 이익을 줄여 세금을 적게 내고 싶을 때 시장가격이 오르고 내린 자산을 골라내 재평가하는 방식으로 자산을 부풀리거나 이익을 줄여 세금을 줄일 수 있는 길이 합법적으로 열린 것이다.
 
■ 회계사들 “시가평가제 시기상조” … 기업은 반사이익

현장에서도 회계를 담당하는 실무자나 재무제표를 감사하는 회계사들은 아직 우리나라가 시가평가제도를 도입하기에는 기업환경이나 회계능력이 부족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한다.

기업 회계감사를 담당하고 있는 한 회계사는 “공정가치 산정이 어렵다 보니 기업이  결산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일을 돕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며 “정작 회계감사를 할 시간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K-IFRS를 시행한지 4년이 지났지만 시가평가는 여전히 결산 작업 때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실태를 털어놨다.

법인이 납부할 세금을 계산하기 위한 세무조정계산서 작성 때도 기업 재무담당자와  회계사, 세무당국이 모두 IFRS 도입으로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회계와 달리 세무당국은 아직도 과거의 원가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시가평가제에 따라 만들어진 재무제표를 재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보다 훨씬 많은 항목을 손을 봐야 하고 그 규모를 계산하는 것도 어렵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법인세의 비용항목인 감가상각을 계산할 때 세무에서는 재평가한 자산의 감가상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세무조정 작업에서는 애써 재평가한 자산을 다시 취득원가로 환원하고 상각액도 환원된 가격을 기준으로 재산정해야 되기 때문에 이중, 삼중 작업을 해야 한다고 실무자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K-GAAP와 K-IFRS 비교

                                                                                        자료 : 금융감독원

특히 회계 일선에서 가장 애를 먹고 있는 부분은 바뀐 회계기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나와도 해결해 줄 곳이 없다는 것이다.

K-IFRS 도입시 유럽의 회계기준을 그대로 번역해 사용하다보니 금감원이나 회계협회도 이해가 부족해 현장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안을 질문해도 곧바로 대답을 못하는 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국제IFRS위원회에 물어봐야 하는데 국제IFRS위원회에 질의가 접수되면 국제 회계전문가들이 모여 논의하고 검토한 후 답변을 받는 절차를 거치느라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이 넘게 걸려 현장에서는 아예 질문을 포기하게된다고 전한다.

이렇게 기업실무자, 회계사, 투자자, 은행, 인허가관청 등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IFRS도입으로 혼란을 겪고 있지만 기업의 경우 반사이익을 얻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기업의 자산과 부채를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행 IFRS 기준은 재평가로 인한 이익은 잉여금으로 처리해 법인세를 안내게 돼있다. 반면 재평가 손실은 바로 손익에 반영해 법인세를 깍아주고 있어 이를 잘 활용하면 조세회피를 합리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일부 회계사들은 선택규정이 적고 의무규정이 많은 GAAP 체계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기업에 선택권을 제한해 통일성있는 회계기준을 적용해야 시계열간 비교는 물론 회사간 평가와 분석이 가능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다.

■ 미국 회계조작 사건 터지자 유럽식으로 급선회

이처럼 K-IFRS가 당초 도입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럽식 회계기준을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단기간에 전격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2008년 리만브라더스 사태가 터지면서 그때까지 미국의 회계제도를 따랐던 우리 기업회계기준(K-GAAP)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당시 핵심쟁점은 자산의 장부가액 문제였는데 그동안 미국식으로 적용하던 원가주의를 시가주의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원은 원가주의를 버리고 시가주의를 채택하고 있던 유럽의 IFRS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금감원은 2009년부터 불과 2~3년의 연구기간을 거쳐 2011년부터 IFRS를 전격 도입했다. 문제는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유럽의 제도를 몇몇개 용어만 고치고 있는 그대로 들여와 우리 실정에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아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형 회계법인의 회계사는 “유럽의 경우 국가의 행정력이 약해 기업의 자율권을 보장하다 보니 기업의 선택규정이 많다”며 “이를 들여온 결과 강제규정에 익숙한 우리 기업과 이해관계자에게 많은 혼란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